삶을 걷다.
기석은 농장을 나가기 전에 아침 일찍 신북천을 한 바퀴 돌아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자신이 말한 대로 여동생이라는 그녀는 이 부근에 자리한 고등학교로 전학을 왔다.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에서 전학을 왔기에 적응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문경에서 시내라고 부를 수 있는 곳은 이곳이 아니라 점촌이라는 곳이다. 그는 낭만이라는 것은 별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냥 매일매일 하는 일을 하는 것뿐이었다. 그냥 사과가 좋았다. 이날은 굳이 따라오지 않아도 될 산책길에 그녀가 따라왔다.
"오빠 여기는 정말 공기가 좋아요. 저 앞에 흐르는 강 이름이 뭐예요?" 그냥 매일 보는 천이었는데 이름은 알고 있었다. "신북천이라는 곳이야. 운달산과 공덕산에서 시작되는 대하천(大下川)과 황장산에서 발원한 동로천(東魯川)이 산북면 대상리에서 금천(錦川)에 합류해서 흘러가."
"그럼 어디까지 가는 거예요?" 그녀는 궁금한 것도 많았다. "아마도 낙동강으로 흘러가서 합쳐질 거야."
"이른 아침이라서 그런가요. 바삭하게 부서지는 것 같은 초여름 햇빛이 좋네요."
바삭하게 부서진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문득 글 쓰는 일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빠 문경을 대표할 수 있는 것을 다섯 가지만 뽑으라면 무엇을 말할 거 같아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굳이 문경을 다섯 가지로 표현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냥 단순하게 생각해보니 문경하면 많은 것이 생각나지는 않았다. "우선 사과, 산, 물, 뭐 이렇게 좋은 자연을 뭐라고 해야 하나..."
"아 그런 것을 풍광이라고 보면 말해요."
그러고 보니 다른 도시를 가본 경험이 많지가 않았다. 어쩌다가 가까이에 있는 도시인 구미를 가본 적도 있지만 구미보다는 문경이 좋았던 것은 아마도 풍광 때문이었을 것이다. "너는 책을 많이 읽었나 봐. 학교 다닐 때의 다른 친구들과는 좀 다른 거 같아." 혼자서 의미 없이 물에 돌을 던져 퍼져나가는 물결을 보던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홀로 있는 시간이 많아서 도서관을 많이 찾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 오빠는 사과농장을 하니까 농부와도 비슷한 거겠네요."
"굳이 말하자면 그럴 수도 있지."
"오빠가 씨를 뿌리지는 않겠지만 농부가 씨 뿌리는 날 행복한 이유는 훗날 수확을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제대로 씨를 뿌리고 싶었기 때문이래요." 그녀는 그런 말을 어디서 들었는지 몰라도 조금은 독특해 보였다. "그런 말은 어디서 읽은 거야?" 갑자기 그녀는 보폭을 큼직하게 걷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요가 수업이 있었어요. 그때 요가 선생님이 무엇을 행하든 자신이 생각한 대로 거두게 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어요. 서두르지 않는 일정함으로 수행의 속도와 방향을 선택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그 목표점에 가있게 된대요. 오빠의 사과수확도 그런 것처럼 보여요." 자신이 사과나무를 어떻게 관리하고 어떻게 수확하는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냥 해야 되기에 했을 뿐이었지만 그녀의 말에 어느 정도 공감이 되었다.
그녀와 3km쯤 걷고 돌아와서 집에서 밥을 먹었다. 그녀는 별 반찬은 없었지만 투정 없이 밥을 잘 먹었다. 기석은 국으로 우거짓국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밥상에 우거짓국은 거의 매일 먹으며 살았다. 특히 봄동이 나올 때 우거지로 끓인 우거짓국은 엄마가 잘해주던 음식이었다. 식사가 끝나고 그녀가 씻기를 끝나고 욕실로 들어갔다. 그는 항상 규칙적인 삶이 일상이었는데 갑작스럽게 트레이닝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그녀는 의외의 변수처럼 보였다. 준비를 끝낸 그녀는 먼저 대문을 열고 나가며 말했다. "오빠 학교 갔다 올게요. 오빠도 하루 잘 보내요." 이 시간에는 마당이 보이는 마루에 걸터앉아 녹차를 마시는 것이 그의 유일한 고급스러운 취미였다. 그는 말없이 손을 흔들어주었다. 나간 줄 알았던 그녀가 대문을 열고 빼꼼히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 아침에 같이 걸은 거 무척 좋았어요. 기묘한 동거라고 하더라도 조금만 참아주세요."
기석이 누구와 같이 무언가 해본 것이 정말 오래간만이었다. 엄마가 아프면서 같이 무언가를 하는 것이 쉽지 않았기에 상당 시간 혼자서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녀와 보낸 시간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첫인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