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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Jul 06. 2021

깨달음의 길

유관순을 이끌었던사애리시

진정한 평등이라는 것은 여성과 남성을 똑같이 만들어버리는 게 아니라 서로 균형을 이루게 하는 것이다. 지금은 많은 것이 변화했지만 일제강점기에는 조선 말기에 이어져온 교육의 기회는 평등하지 못했고 여성에 대한 차별이 심했다.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문제를 반영하면서 계속해서 자기 자신을 변화시켜나가는 것이 쉽지 않은 시기에 이 땅에 온 선교사들은 깨달음의 길을 열어주기도 했다. 

공주분들이야 잘 알겠지만 다소 생소한 공주 중학동 구 선교사 사옥을 찾아서 올라가 보았다. 일제강점기에 이곳에서는 공주 유아복지 사업이 시작되었다. 1927년에는 공중위생 간호 학원이 설립되었는데 산전 클리닉과 조산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아기 어머니들을 위해 장기적으로 건강과 위생에 대한 다양한 교육을 실시했다고 한다. 

골목을 올라가면서 공주 근대역사의 옛날 사진을 본다. 이곳과 멀지 않은 곳에 공주시 근대문화 탐방길의 공주기독교 박물관이 있으며 공주시 근대문화탐방길의 선교사 집이 있다. 선교사 집의 이정표를 보고 찾아서 가본다. 

이런 곳에 집이 있을까란 생각을 하면서 걸어서 올라가 본다. 이 낮은 산을 중심으로 산책로가 있는데 저 건너편으로 넘어가면 공주 금학동 고분군이 나온다. 중학동에서 금학동으로 갈라지는 구간이다. 공주 금학동 고분군에서 아래로 조금 더 내려가면 공주 수원사지가 자리하고 있다. 

과연 집이 있겠어라고 생각할 때쯤 적색 벽돌의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옛날에는 땅도 많았을 텐데 왜 이곳까지 와서 건물을 지었는지는 모르겠다. 건축 연대는 1921년 10월 23일이 합당하며 일제 강점기 말기 최후 거주자는 그동안 Amendt 선교사로 알려져 왔으나, 1939년 작성된 Williams 선교사의 편지 및 새로운 증언에 의해 Alice Sharp 선교사가 1939년 은퇴 시까지 사용하였던 건물로서 독신 여선교사들의 주거는 물론 여학교 역할도 하였던 건물로 밝혀졌다고 한다. 

간단하게 선교사 사옥에 대한 설명이 적혀 있다. 공주는 많이 와봤지만 선교사 가옥이 남겨져 있는지는 몰랐다. 대전에도 선교사 가옥이 한남대 옆에 남겨져 있다. 

자세히 살펴보니 창호시설의 경우 본래의 상하 미닫이 창호였던 것으로 보인다. 건물의 남서 측 계단이 오래되어 보였다. 문화재의 하부 지반의 안전성에 관한 지반도 약간 기울어져 보였으며 이 선교유적이 2~5 m 두께의 불균등한 표토층 위에 건축된 것으로 보인다. 

다시 안쪽으로 걸어서 들어가면 사에리시라는 인물에 대해서 접해볼 수 있다. 공주에 충청도 최초로 여학교를 세워서 유관순 등 많은 여성들을 교육으로 일깨운 근대 여성교육의 어머니라고 한다. 그녀는 공주를 비롯한 충남지역에 20여 개의 교육기관을 세웠다고 한다. 유관순, 독립운동가 김현경, 최초의 여성경찰서장을 지난 노마리아 등 많은 여성 인재들을 배출하였다고 한다. 

살아생전의 모습은 보지 못했지만 옷을 입는 센스가 있어 보이는 여성이다. 그녀는 1972년 10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녀는 202년 3월의 공주역사인물로 선정되었다고 한다. 

주택의 1층에서도 공주 시가지와 도심 하천인 제민천이 훤히 보이는 전망 좋은 위치에 자리 잡은 사택은 목구조도 기본적으로 미국식이고, 목재도 인천항을 통해 수입된 부재를 썼다고 한다. 선교 사옥은  지하 1층, 지상 3층으로 지어진 미국식 주택이다. 현관으로 들어가서 반 층을 올라가면 1층, 반 층을 내려가면 지하층인 스킵 플로어(skip Floor) 구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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