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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Jul 09. 2021

선조(宣祖)

노력했지만 시대가 암울했기에 벅찼던 군주

조선시대 임금중 선조를 말할 때 세 가지의 키워드를 뽑으라면 임진왜란, 이순신, 광해군이 아닐까. 임진왜란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생겼고 이에 분조를 하여 어쩔 수 없이 광해군을 세자로 임명했다. 이순신 역시 탐탁지 않았지만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하면서 수군을 이끌게 했다. 선조가 임금이었지만 모든 것이 마음대로 되는 것은 많지가 않았다. 선조를 말할 때 임진왜란 외에도 많은 이야기가 있다. 그 역시 백성들의 신망을 받기 위해 노력했던 군주이기도 하다. 

태실비를 여러 곳 보았지만 사찰과 같은 공간에 자리한 곳은 처음 보게 된 곳이었다. 부여의 오덕사에는 선조의 태실비가 남겨져 있다. 선조는 선대왕인 명종이 후사 없이 죽으면서 왕위에 오르게 된다. 명종은 그 유명한 태릉선수촌이라는 이름에 사용된 태릉의 주인공 문정왕후다. 

오덕사라는 사찰보다 선조대왕 태실비로 더 알려진 곳이다. 조선 제14대 임금인 선조(재위 1567∼1608)의 태함(태를 묻는 돌로 만든 함)을 만든 후 이를 기념하기 위해 1570년에 세운 비가 있다. 세월이 지나면서 글씨가 많이 닳아 있어 영조 23년(1747)에 다시 세워 놓은 비석은 충청남도의 문화재자료 제117호로 관리되고 있다고 한다. 

오덕사에는 유명한 것은 보물 제1339호로 지정된 오덕사 괘불탱이다. 괘불이라는 의미는 '걸개를 마련하여 매단 부처'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는데 오덕사 괘불탱은 꽃가지를 든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아미타불과 약사불, 사천왕 등이 함께 그려져 있다. 

선조대왕 태실비를 보기 위해 걸어서 올라가 본다.  선조는 주자학을 장려하고 사림을 널리 등용했으며, 스스로 학문에 힘써 강연에서 이황·이이·성혼 등 대유학자들과 경사(經史)를 토론했던 군주였다. 그렇지만 그가 왕위에 올랐을 때 동인과 서인이 서로 나뉘어서 붕당 간의 권력 쟁탈이 심각해졌다. 

오덕사의 관음전에는 낮은 높이의 돌당간이 보인다. 선조대왕태실비는 바로 이곳의 바로 옆에 자리하고 있다. 

태실비에 접근하기가 비교적 용이한 곳이다. 대부분 산속의 풍수지리가 좋은 곳에 있어서 찾는 데에도 시간이 걸린다. 태실비 양쪽으로는 배롱나무가 심어져 있다. 

태실비는 왕자가 태어나면 풍수지리가 좋은 곳에 태실을 묻기 위해 만든 공간과 비다. 선조는 1590년 황윤길(黃允吉)·김성일(金誠一)·허성(許筬) 등을 파견하여 일본의 동태를 파악하도록 했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동인과 서인의 정치적 대립으로 인해 일본을 명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오덕리에 있기에 오덕사이기도 하지만 오덕리에 자리한 태실비의 형태는 거북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다. 앞면에는 ‘선조대왕태실’이라고 새겨 모셔 놓은 태의 주인공을 밝히고 있고, 뒷면에는 비를 세운 시기를 적어 놓았다. 

대웅전 안에 있는 궤불탱을 보면 잠시 고개를 숙였다. 지금 보는 궤불탱은 보물 궤불탱은 아니지만 그 궤불탱을 연상하게끔 해주고 있다. 태어나서 태실비를 세운 선조는 주자학에 조예가 깊었고, 서화에도 뛰어났다고 한다. 선조의 태실비는 부여에 있으며 능은 경기도 양주에 있는 목릉(穆陵)이며, 전(殿)은 영모전(永慕殿)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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