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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Jul 09. 2021

한산이씨(韓山李氏)

한산의 호족으로 시작해 이색으로자리 잡다.

모든 성씨에는 시작이 있다. 성씨 중 대표적인 사람도 있지만 성씨에도 다양한 시작점이 있다. 서천의 한산이라는 지방은 모시송편으로도 유명하지만 소곡주도 있고  한산모시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한산 이 씨가 터를 잡고 살던 곳이기도 하다. 호장공계의 시조 이윤경은 한산 지방에 토착하여 세거해온 호족(豪族)의 후예로 향리(鄕吏)의 우두머리인 호장(戶長)을 역임했다. 원래 호장은 고려시대에 지방관을 파견하지 못하는 곳에 그곳의 유력가문의 장으로 지방관을 대신하는 것으로 단순히 말해서 미국의 지방 보안관을 생각하면 된다. 

미국의 경우 연방경찰이 있고 주 경찰이 있는데 그 영향이 미치지 않는 곳에 보안관제도를 운영하고 있는데 보완관은 세습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한산지방의 호장이었던 이윤경 역시  이때부터 5대에 걸쳐 호장직을 세습해 오면서 가문의 기틀을 다졌다고 한다. 이곳에는 한산이씨시조묘역이 조성이 되어 있다. 

호장공묘역도 따로 조성이 되어 있다. 한산이씨의 시작점으로 올라가 보면 한산에 자리 잡은 호장공계가 있지만 한산이씨의 권지공계(權知公系)도 있다. 호장공계의 이곡은 이윤경의 5대손으로 당대의 대문장가로 알려졌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명문가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한산이씨가 빛을 발하게 된 것은 그의 아들 이색이 1320년(충숙왕 7년) 문과에 급제하고 원나라 제과(制科)에도 급제한 후 이색이 1362년 홍건적의 난 때 왕을 호종(扈從)한 공으로 세워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에 봉해졌기 때문에 후손들이 본관을 한산으로 정하게 된다. 이때부터 한산이씨는 번성하게 되는데 잘 아는 사람이라면 토정 이지함이 있다. 그리고 성삼문과 함께 단종복위를 추진하다 참형을 당한 이개(李塏)로 사육신으로 알려져 있다. 

한산이씨는 이렇게 시조묘역이 있지만 경주최씨의 경우는 시조묘역이 없다. 최치원이 바람같이 살다가 산으로 들어가서 신선이 되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전국에 많은 흔적을 남겨 놓고 있다. 사람은 떠나지만 남는 것은 결국 후대로 이어지는 가물가물한 기억과 이색의 확실한 기록물인 ‘목은집(牧隱集)’ 50권과 같은 흔적이 남는다. 

묘역옆으로 오면 지현리 삼층석탑이 있다. 지붕돌인 옥개석 3매와 탑신석 4매로 구성된 석탑인데 원래는 5층 석탑으로 추정하고 있는 석탑이다. 1층 탑신에 새겨진 총 8행 66자의 명문에는 고려 성종 10년 한산 지방의 호족이 나나를 지키기 위한 뜻을 담아 이 탑을 세웠다고 적혀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 대를 이어서 만들어낸 공간이기도 하다. 이곳은 이렇게 더운데 남쪽 지방의 날씨는 다르다. 참 많은 것이 빠르게 변하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석탑의 높이는 205cm이다. 991년에 만들어졌으니 무려 1,000년이 훌쩍 넘었다. 

이(李)씨 중에서는 전주이씨(全州李氏)와 연안이씨(延安李氏) 다음으로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는 한산이씨는  과거(문과) 급제자만도 198명이었다고 한다. 다음번에는 충청남도 서천(舒川)에서 출생하였으며 한산이씨 중 근·현대인물로 두각을 나타내는 인물은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의 생가를 찾아 이야기를 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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