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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Jul 12. 2021

나이는 숫자

서천에 자리한 월남 이상재 선생 생가지

사람들이 가진 고정관념 중에 하나가 바로 나이에 대한 것이다. 청년이라고 해서 진보적이고 젊은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나이가 50, 60을 넘었다고 해서 젊은 생각이 없지가 않다. 정치에 젊은 나이가 들어온다고 해서 정치가 젊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큰 오산이다. 젊은이라는 것은 세대론도 생각하지 없고 가치관에 얽매이지 않으며 자신이 현재 처한 곳에 머무르지 않을 용기와 계속 자신을 둘러싼 껍질을 깰 수 있는 사람이다. 

나이가 들었지만 영원한 젊은이로 살았던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월남 이상재라는 사람이다. 지난 3월에는 월남 이상재 선생의 제94기 추모식이 있었다. 이곳은 서천에 자리한 월남 이상재 선생 생가지다. 

날이 무척이나 따뜻한 날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너무 따뜻해서 옷이 점점 얇아지고 있다. 주차장이 넓게 조성되어 있어서 편하게 주차를 하고 생가지로 걸어서 들어가 본다. 

시간이 과거로 돌아가서 월남 이상재 선생을 만나는 시간이다. 조선말, 월남 이상재(李商在․1850~1927)가 의정부의 총무국장을 맡았었는데 고종 임금이 ‘전운사’라는 관청을 다시 설치하려고 했을 때 단호하게 거부했다. 전운사는 백동화를 남발, 나라 경제를 엉망으로 만들었다가 폐지된 관청이었기 때문이었다. 나이가 들면 어떤 자리까지 올라가면 그 자리를 지키려고 한다. 그러나 젊은이는 그 자리마저 연연하지 않을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다. 

이곳은 서천군 청소년수련관이 기획한 ‘월남 이상재 선생과 함께 떠나는 시간여행’ 사업이 국가보훈처 주관 2021년 보훈 테마활동 공모사업에 선정된 곳이기도 하다. 

월남 이상재 선생은 해학이 담긴 말을 많이 했었다. 특히 젊은 사람들과 많이 어울리며 그들의 생각과 행동에서  많은 것을 듣고 보려고 했던 사람이다. 생가의 마당은 여유가 있었다. 마당극을 해도 좋은 공간이다. 

어릴 적에 그렇게 여유 있는 환경에서 자라지 못했지만 해학을 읽지 않았던 그가 삼일운동 후에 검사에게 취조를 받을 때의 일이다. 검사가 "이번의 만세 운동은 누가 시켜서 일으켰소?" "운동이란 원래 혼자 하는 건데 시키기는 누가 시켜?" 이상재는 문초를 받으면서도 이처럼 받아쳤다고 한다. 맞다. 운동은 원래 혼자 하는 건데 누가 시킨다고 하겠는가. 

지금도 어떤 집에 가서 자신이 지위가 있다고 생각하면 하인에게 말하듯이 이리 오너라가 일반적이었다. 하루는 이상재의 집에 순경이 와서 "이리 오너라!" 하고 소리쳤다고 한다. 이상재는 순경인 줄 알면서도 짐짓, "오오냐, 나간다" 하고 대문을 열었다. 그러자 순사가 화를 내며 대들었다. "경찰관에게 왜 해라를 하는 거요?" 이상재는 태연한 태도로 대꾸하였다. "이리 오너라 하고 먼저 해라를 하기에 나도 오오냐 나간다고 했을 뿐인데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그의 생가를 보면 그저 먹고살 만한 중농의 집 규모임을 알 수 있는데 충청도 서천의 한산 땅에는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 1850~1927)의 생가가 잘 보존되어 있고 유물관도 세워져 있다.

그는 청년들의 지도와 교육에 전념하면서 일본 · 중국으로까지 활동을 넓혔는데 일제는 그에게 거금 5만 원을 주겠으니 고향에 돌아가 편안히 지내라고 회유했다. 어림없는 짓거리였다고 한다. “이 돈으로 땅을 사라니 나더러 죽으란 말이지. 나는 타고나기를 편안히 일생을 마치지 못하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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