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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Jul 19. 2021

여름이 만든 공간

백제 위덕왕이 만들었다는 영랑사

사람들은 극적이든, 비극적이 든 간에 스토리가 있는 이야기를 기억한다. 공주에서 부여로 천도를 하고 나서 백제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대국가의 마지막을 장식하게 되었다. 부여 천도 후에 기억되는 왕으로 선화공주와 사랑을 나누었다는 무왕과 그의 아들이었던 망국의 군주 의자왕은 가장 많이 회자되는 사람이다. 전체 높이는 62.5cm이고 뚜껑, 머리, 다리 부분을 만들어서 하나로 만들어진 금동대향로는 백제의 기술의 정수를 보여준다. 당시 능산리 사찰을 만들었으며 그 사찰에 있는 목탑이 있다. 목탑 아래에서 금동대향로가 발견되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 당시의 왕이 위덕왕이다. 

위덕왕은 선화공주와 사랑을 했다는 서동보다 2대에 앞선 왕이다. 아버지였던 성왕이 551년 신라와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여 한강 유역의 6군(郡)을 되찾았으나 곧 신라군의 공격으로 다시 빼앗기며 세상을 떠났을 때의 태자였다. 

성왕의 죽음 이후로 백제는 내리막길을 걸었다. 그 이후 신라는 백제와의 전쟁에서 여러 번 승리해서 백제 중심부와 인접한 내리서성(영동군), 장대리 고분군(금산군), 계족산성(대전광역시 대덕구)등 신라의 영역이었다. 

위덕왕 때 당진의 영랑사라는 사찰을 세웠다고 한다. 백제때 많은 왕은 불교에 많은 관심과 예산을 쏟아부었다. 성왕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출가하여 불도를 닦으려 했으나 신하들의 만류로 철회하고 3년 상을 치른 다음 557년 공식적으로 왕위를 승계했던 사람이 위덕왕이다. 

위덕왕 때 만들었다는 영랑사는  고려 선종 8년 (1091)에 대각국사 의천이 크게 수리하였으며 조선 숙종과 순조 때 보수하였다. 영랑사는 지금 남아 있지만 그가 아들을 잃고 세웠던 왕흥사는 현재 남아 있지 않다. (丁酉年二月十五日 百濟王昌 爲亡 [33]王子 立刹 本舍利二枚 葬時神化 爲三) 정유년(丁酉年: 577) 2월 15일 백제왕 창(百濟王 昌)이 죽은 왕자를 위하여 찰(刹)을 세우는데, 2 매였던 사리가 장시(葬時)에 신(神)의 조화로 3매가 되었다.

영랑사의 대웅전은 고려 선종 때 대각국사 의천이 한번 수리하며 그 모습을 갖췄으나 이후 몽고의 침입 등 나라의 환란으로 그 모습을 잃었던 곳이다. 영랑사 대웅전은 충남도 유형문화재 제15호로 지정돼 있으며 당진 유일의 목조 문화재이다. 

영랑사로 오르는 길 주변엔 원효깨달음 길이라는 둘레길이 조성되어 있는데 해골에 담긴 물을 마시고 깨달았다는 곳이 이곳에서 멀지 않다고 한다. 

영랑사라는 곳은 여러 가지 이야기를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멀리서 보면 아무것도 안 보이지만 안으로 들어가서 보면 시원스레 시야가 열리는 곳이다. 그런 곳이 복이 있는 땅이라고 한다. 산과 물이 어우러지면서 멀지 않은 곳에 물이 있다. 거기에 삶이 있는 운치를 소화할 수 있는 책을 갖추어 놓으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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