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줄과 왼새끼

대덕구 읍내동 장승과 불망비

지금이야 대전에도 다양한 지역에 공단이 만들어져 있지만 불과 30년까지만 하더라도 대전에서 가장 많은 직원을 고용하는 곳은 대화동 공단이었다. 대학을 다닐 때도 야간반이 있었는데 그때 50% 이상이 바로 이곳을 다니었던 것으로 기억할만한 많은 사람들이 직업을 구했던 곳이다. 우연하게 찾는 이곳에서 돌에 묶인 금줄을 보고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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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는 날이 너무 좋아서 그런지 어디를 가도 배롱나무 꽃을 볼 수 있다. 대화동 공단의 입구에도 배롱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지금은 기업들이 많이 다른 곳으로 이전하고 없어졌지만 아직까지 이곳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이 적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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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 보이는 두 개의 석장승이 바로 읍내동 장승이다. 멀리서 보면 그냥 선돌처럼만 보인다. 국립 민속박물관이 1991년에 발간한 장승과 솟대 신앙에 따르면 대화동에서 읍내동으로 진입하는 작은 다리(읍내교)를 건너면 길 양옆에 장승 2기가 비스듬히 마주 보고 있었다고 한다. 대화동 공단이 가장 활성화되었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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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적으로 어떤 형태가 보이지는 않는데 길쭉한 자연석을 이용한 선돌형에는 몸체에는 아무런 형상이나 호칭이 새겨져 있지 않다. 그냥 4개의 줄이 수직으로 음각되어 있다. 이제 출산율이 가장 시급한 과제가 된 이때에 금줄은 낯선 것일 것이다. 오래전에는 빈부격차나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든지 출생과 더불어 금줄과 인연을 맺었다. 금줄은 단순해 보이는 새끼줄을 범상한 줄로 바꾸는 의식적 비약이기도 하다. 금줄은 모두 왼새끼인데 정상적인 새끼는 오른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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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장승에는 금줄이 둘러 있었는데 여장승에는 금줄이 보이지는 않았다. 아까 보았듯이 읍내동에 사는 분들 중 나이가 드신 분들은 금줄이 마을공동체 문화 전체에서 신성시하는 모든 영역에 금줄을 늘여놓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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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오면 아무 형상도 없었던 읍내동 장승과 달리 공적을 새겨놓은 현감 한 공성보 물세 불망비가 자리하고 있다. 접근성은 좋지 않지만 잘 찾아보면 바위에 새겨놓은 한자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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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야 기록을 남길 수 있는 방법이 많이 있지만 오래전에는 기록을 남길 수 있는 방법이 많지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에라도 기록이 될 수 있을 정도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이렇게 그 공적을 돌에 새겨다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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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새겨진 회덕현의 수령이었던 한성보는 논산의 신독재 김집과 우암 송시열의 문인으로 학문을 닦았다고 한다. 그렇지만 숙종 때 우암 송시열이 명을 받아 세상을 떠나자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 초야에 묻혀 독서로 소일하다가 78세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불망비에는 현감 한공성보라고까지 보이는데 밑에는 파묻혀 있는지 보이지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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