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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Jul 29. 2021

불망 (不忘)

김수남·성삼문·조계명의금곡서원

지금은 남한산성이라는 곳이 공원이자 역사적인 공간으로 잘 조성되어 있다는 방송 등을 본 기억이 난다. 그곳에서 6년을 살고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와서 어떻게 변했는지는 알 수는 없지만 어릴 때 남한산성 [南漢山城]은 1주일에 한 번 이상은 올라갔던 곳이었다. 그곳은 1636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전쟁이 일어났던 곳이다.  후금의 위협이 고조된 1624년부터 축성되어 1626년에 완공된 남한산성은 해발 500m가 넘는 곳에 자리 잡은 산성으로 성곽의 전체 길이는 12.4km에 이른다. 그렇지만 병자호란 [丙子胡亂]을 막지는 못하였다. 

불망이라는 것은 잊지 말아 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최명길과 김상헌의 날 선 논쟁의 대사들을 고스란히 남한산성이라는 영화로 투영되었다.  영화에서는 김상헌이 홀로 순절한 것으로 나왔으나 이때 같이 순절한 사람이 있었다. 1630년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고, 병자호란 때 묘사(廟社)를 따라 강화도로 피란하였다가 병자호란 때 김상용과 같이 순절한 김수남을 모신 곳이 이곳 연산의 금곡서원이다. 

금곡서원은 초기에는 금곡사로 불렸던  곳이다. 처음에는 김수남을 기리며 세워진 곳이다. 그는 “사국(死國)의 두 글자는 남아로서 정해진 바이니, 나라의 일이 이에 이르렀는데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후일에 바라는 바는 오직 내 두 아들이 어머니를 위로하면 나는 죽어도 한이 없겠다.”라는 유서를 썼다고 한다. 

추후에는 절개를 지킨 사람으로 사육신의 한 명이며 그의 일부가 논산에 묻혀 있다는 성삼문도 같이 배향되었으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를 모시고 동생 조계장(曺繼章)과 윤탁(尹鐸)‧박사겸(朴思謙)‧박사제(朴思齊)‧노순(盧錞) 등 함께 여러 싸움터를 누비며 전공을 세웠더 조계명도 배향하고 있다. 

금곡서원은 골목길의 안쪽으로 들어가야 된다. 양쪽에는 일반 민가들이 자리하고 있다. 멀리서 보니 외삼문의 안쪽으로 백일홍이 보인다. 

이곳에 모셔진 김수남, 성삼문, 조계명은 모두 지식인이다. 옛날에 배우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위해 배웠다고 한다. 지식은 그런 것이라고 한다. 스스로 부족함을 모르는 이를 소인이라고 생각하였다. 군자는 자기의 말이 뒤틀린 결과 행동이 허물이 되는 것을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그렇기에 이곳에 모셔진 사람들도 일관성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이 전각은 충신 김수남 정려다. 앞서 말한 김수남은 광산 김 씨이며 사계 김장생의 문인이었다고 한다. 충청도와 대전의 인물 중에 사계 김장생에게 안 배운 사람이 없을 정도다. 정려는 정면과 측면 1칸으로, 4각 주초석에 둥근기둥을 세우고 우진각 지붕을 올렸다. 4면은 홍살로 둘렀고 처마는 겹처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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