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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Aug 06. 2021

김종직의 후손

고요한 고령의 개실마을을 돌아보며.

연산군은 정말 폐비 윤 씨를 너무나 사무치게 그리워하다가 결국 사화를 일으키고 흥청망청의 시작이 된 흥청(興淸)을 만들어 기녀(妓女)를 탐하고 폐위까지 당했을까. 사람에게는 그릇이 있다는 말이 맞을 때를 너무 많이 본다. 그릇이 작은데 너무 많은 것이 담기면 사람이 그걸 어찌하지 못한다. 돈이나 지위, 권력 모든 것이 그러하다. 조선왕조에서 역사상 다음의 왕위로 채택된 사람들은 상당한 트레이닝 과정을 거쳤다. 국가를 운영하기 위한 모든 과정을 보고 배우고 익혔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 자체를 못 견딘 사람들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연산군이 그러하다. 

고령군의 개실마을은 고령군에서 유일하게 한옥과 고택으로만 이루어진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연산군 때 세조의 즉위를 비판하여 지은 조의제문으로 인해 무오사화로  부관참시(剖棺斬屍)당하고 생전에 지은 많은 저술도 불살라졌던 김종직의 후손들이 모여 살던 곳이다.  

지금은 너무 평화로운 곳이지만 서슬 퍼런 당시에는 숨죽여 살 수밖에 없었다.  민속자료 제62호 점필재종택, 문화재자료 제111호 도연재, 유형문화재 제209호 점필재의 문적 유품 등의 문화재가 있는 이곳은 고택의 풍광이 좋은 곳이다.  마을 안 길을 흙담으로, 주민이 공동 식수로 사용하던 우물과 한옥 등을 보수/복원하여 옛 고향의 모습을 갖추어 두었다. 

공간이 넓어서 주차공간도 넉넉하고 골목길의 안쪽 길을 탐방하며 돌아다니기에도 좋다. 김종직의 아버지 숙자는 고려말·조선초 은퇴하여 고향에서 후진 양성에 힘썼던 길재(吉再)의 제자이기도 한데 구미에 있는 길재의 묘소는 시간이 되면 한 번 가볼 생각이다. 

고령의 어떤 지역을 갔다가 우연하게 옆집에 사는 분에게 집을 내놓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한옥이 있고 마당이 약간 있는 집이었는데 가격이 그리 비싸지는 않았다. 마당 있는 집은 자신만의 공간과 같다고 할까. 다양한 색깔로 만들 수 있는 매력이 있다. 

마을의 곳곳에 긴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는 고령 개실마을(한옥마을)에는 지금도 점필재 종택을 중심으로 그 후손들이 모여 살며 한옥체험이나 농촌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는 곳이지만 모두들 코로나19에 제한적으로 혹은 운영하고 있지가 않다. 개방이 안되어 있는 집들도 여럿 있다. 

개실마을은 2001년 행정자치부로부터 ‘아름다운 마을 가꾸기 사업 시범마을’로 지정받으면서 농촌체험마을로 기반을 마련하였다. 개실마을은 제사와 차례에 전통방식을 고수하고 있으며 대다수 주민은 20촌 이내인 가까운 혈족이기에 김종직의 생각 혹은 사상을 이어가고 있다. 

선산 김 씨 집성촌으로 영남학파의 종조인 점필재 김종직(1431~1492)의 후손들이 모여사는 공간의 흙담길을 조용하게 걸어본다. 영남의 집성촌을 가면 아쉬운 것이 담이 너무 높아서 집을 바라볼 수 없지만 이곳은 담이 낮아서 좋다. 

비석으로는 김 씨 세거비, 김씨5세 효행사적비, 병조참의기정김공유적비, 의사경기전참봉선은김공유적비 등이 마을 앞에 세워져 있다.

이곳도 백일홍이 피어 있는데 손으로 살짝 만져보니 부드럽고 따뜻했다. 물론 온도가 온도인지라 따뜻할 수도 있지만 기분상 그렇다는 이야기다. 개실마을의 우리나라의 유학사에 불멸의 자취를 남긴 대학자인 동시에 시문에 뛰어난 문장가인 점필재 선생은 소학을 기초로 해 대학·논어·맹자·중용 등을 복합해 도학을 완성했고, 후대에 유명한 문인들을 많이 배출하면서 인생을 통한 소재로 자유로운 표현을 했던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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