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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Aug 19. 2021

삶의 기준

몰랐으니까! 해방될 줄 몰랐으니까!

독립운동가와 친일파를 생각할  떠오르는 대사는 영화 암살에서  동지를 팔았냐는 질문에 "몰랐으니까! 해방될  몰랐으니까!"라는 이정재의 대사가 연상된다. 삶이 그렇다.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것이 인생이며 삶이다. 자신이 조금  편하게 혹은  잘살기 위해 살다 보면 변화를 놓치게 된다. 굳이 주변을 돌아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살아가는 기준이 삶의 기준이선택의 기준이 탐욕이며 자신의 편익이라면 그것은 분명한 배신이 될 가능성이 크다.

하늘이 변화하는 것처럼 삶도 역시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변한다. 그렇기에 자신의 세운 기준이나 일관성은 계속 유지하는 것이 변화에 잘 대응하는 방법이다. 친일을 했던 사람들 대부분은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했던 사람들이다. 그때그때 다르게 살았던 것이다. 반면 독립운동가들은 자신의 삶의 일관성을 꾸준히 유지하면서 살았다.

청양에는 면암 최익현이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애국지사나 독립운동가였던 사람들의 흔적이나 묘소가 많이 남아 있다. 면담 최익현에게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르고 자신의 신념대로 활동했던 사람들일 수 있다. 애국지사라는 이세영 유적지의 이정표를 보고 안으로 들어가 본다.

이정표를 보고 안으로 들어오면 쉽게 찾기 힘들지만 눈을 부릅뜨고 다니다 보면 유적지를 볼 수 있다. 이곳이 그곳이라는 생각을 못할 수도 있다.

이곳은 충남 청양군 장평면 관현리 갓 고개로 독립운동가(1869~1938)는 한말 의병운동부터 삼일운동, 임시정부 수립까지 일생을 독립운동에 몸을 바쳤다고 한다. 일제 침략에 항거해서 을미와 병오 홍주의병에서 민종식 의병장 등과 함께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유배되었다가 1908년에 형 집행 중지로 풀려난 후 이곳에 성명학교를 설립했었다고 한다.

이세영은 독립군 양성을 위한 신흥 무관학교 교장으로 독립군 양성을 하기도 했었다. 신민회의 '신'자와 다시 일어난다는 의미의 '흥'자를 붙여 신흥강습소를 조직했는데 1919년 5월에는 학교 이름을 신흥 무관학교로 개칭했고 1920년 폐교 시까지 졸업생 2,000여 명을 배출하여 독립군 양성에 크게 기여했다. 최근 유해가 송환된 홍범도 장군의 청산리 전투에도 신흥 무관학교 출신들이 많이 참여를 했다. 신팔균, 이범석, 지청천 등이 이곳에서 교관을 맡았다고 한다. 의열단 단장으로 널리 알려진 김원봉도 신흥 무관학교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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