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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Aug 31. 2021

부여 왕릉원

성왕, 위덕왕, 법왕, 혜왕, 무왕, 의자왕의 부여

고분군이라고 하면 주인도 모르며 어떤 지위에 있었는지 확인이 안 되는 사람들이지만 귀족이나 왕이 묻혔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무덤을 지칭한다. 부여에 있는 왕과 왕족이 묻혀 있는 능산리 고분군이라는 명칭은 일제가 명명한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송산리 고분군과 능산리 고분군은 발굴조사가 이뤄져 일부 무덤의 축조 방법과 규모가 확인하고 조선총독부가 고적으로 지정하면서 명칭을 지었다. 

부여로 천도하고 나서 가장 치열했던 신라와의 전투는 관산성 전투다. 관산성은 일본서기에 함산성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지금의 위치로 보면 충청북도 옥천 지방이다. 이어 왕위에 오른 성왕의 아들 위덕왕 역시 부왕 성왕이 관산성 전투에서 패하여 사망하자 왕권이 크게 약화되었다. 

부여에 자리한 왕릉원에 오래간만에 머물러 보았다. 이곳에는 성왕, 위덕왕, 혜왕, 법왕, 무왕 그리고 의자왕은 이곳에 시신이 없지만 가묘로 만들어져 있다. 

대한민국이 광복 이후 1963년 사적으로 다시 정했으나 역사적 성격에 맞는 명칭이 아니라는 지적이 제기돼 왔었다. 긴 시간이 지나고 나서 문화재청은 14일 사적인 '공주 송산리 고분군'과 '부여 능산리 고분군' 이름을 각각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부여 왕릉원'으로 바꿀 예정이라고 밝혔다. 

백제가 공주에 수도를 둔 웅진 도읍기(475∼538)와 부여로 천도한 뒤인 사비 도읍기(538∼660)의 왕릉과 왕릉급 무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공주의 송산리 고분군은 무령왕릉이 포함된 이름으로 정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사비천도를 전후하여 소멸된 것으로 보고 있는 백제의 담로 제도가 아쉬운 부분이다. 중국의 북경, 성양, 광릉, 회계, 왜 등에 지방통치의 거점을 만들었던 것을 의미하는데 백제의 영역이 상당히 넓은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역사를 보면 기록이 정말 중요한 것을 일 수 있다. 최근 100년 사만 보더라도 명백한 기록이 있어도 왜곡되고 잘 못 전달되는 사례도 상당히 많다. 미디어에서 쏟아내는 정보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진실은 찾기가 더 어려워진다. 그 엄청난 데이터를 한정된 시간에서 파악한다는 것은 무척 어렵다. 유튜브가 가장 큰 문제가 있는 미디어 중 하나다. 그것을 보다 보면 자신과 생각이 비슷한 콘텐츠만 계속 보여주니 사람들의 생각이 자신과 비슷하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자연 속에 설치작품들도 눈에 뜨인다. 

부여 왕릉원으로 명칭이 바뀔 이곳은 1960년대에 봉분을 정비하다가 고분 2기가 추가로 확인되어 현재까지는 총 17기의 고분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왔는데 지난 2016년에는 고분 3기가 추가로 확인되었다고 한다. 

조금은 다른 주제지만 최근 옷을 꼭 필요한 것만을 구입하는 운동이 주목받고 있다. 옷을 만드는 데 있어서 수많은 과정이 필요하고 자연에 오염이 되기 때문이다. 자연에서 만들어진 재료로 만들어 입었던 때는 목화가 중요했었다. 문익점이 목화씨를 가져온 14세기 이전에도 이 땅에서 면직물을 만들기는 했다고 하는데 이미 800년 앞선 면직물인 백첩포가 충남 부여 능산리 절터 백제 유적서 출토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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