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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Oct 03. 2021

흔적

고려의 국찰이었던 개태사지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과거의 이야기를 너무 쉽게 생각한다. 현재의 가치를 알기 위해서는 과거의 흔적을 찾아야 한다. 왜 그 시대에는 그런 가치를 추구하고 지향했는가를 찾아가다 보면 현실 속의 의미도 찾을 수 있다. 논산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새롭게 지어진 개태사는 여러 번 가봤지만 그 안쪽에 들어가면 나오는 개태사지는 이번에 처음으로 가보았다. 

개태사와 개태사지가 자리한 곳은 천호마을이라고 해서 하늘이 보호하는 마을로 천호리 자치 취원회에서 조성하고 관리하는 길이 자리하고 있다. 개태사와 개태사지를 중심으로 선녀탕 쉼터, 왕건 쉼터, 천호산 쉼터, 산지당 쉼터가 있다. 

이곳에서 샘물을 길어먹었던 모양인데 조금 특이하다. 옹기로 샘을 보호하고 있다. 옹기는 흙을 빚어 구운 그릇을 의미하며 신석기시대에 만들어 썼던 빗살무늬 토기가 발전하여 지금의 옹기가 만들어진 것으로 우리 고유의 음식인 김치, 고추장, 젓갈 등을 담았는데 그 방식이 유효해서 김치냉장고에서도 응용하기도 한다. 

개태사지로 가는 길에 석조가 있다. 석조는 사찰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것으로 물을 담아놓기도 하고 행사가 있을 때 이용하기도 했다. 개태사지 석조는 직사각형과 사각형 2기가 있다. 직사각형 석조는 통일신라 시대를 특징을 계승한 것으로 북쪽 면에 2개, 서쪽 면에 1개의 안상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사각형 석조는 마모방지를 위해 지하에 매몰된 상태로 보존하고 있다. 

고려왕실의 국찰이었던 개태사는 후삼국을 통일하고 하나 된 고려를 이룩하고자 했던 태조 왕건의 이상이 담겼던 사찰이다. 이곳에서  발굴된 개태사지 석조여래 삼존 입상과 개태사 쇠북은 고려 태조를 상징하듯이 당당하면서도 위엄이 있는 자태를 갖춘 불상과 국내 최대의 쇠북으로 가치가 무척 크다고 한다. 

이 앞에 너른 공간의 개태사 터에서는 다양한 유물들이 발견되었는데 글자가 새겨진 기와, 수막새, 암막새, 수키와, 암키와 등의 기와가 발굴되었다. 기록을 살펴보면 고려시대 개태사는 936년에 창건한 뒤 시간이 흘러 1362년 공민왕 때에는 개태사의 태조진전에 가서 강화로 천도하는 일을 점을 치기도 했었다. 

이곳에 건물들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태조의 뜻을 계승하는 상징적인 왕실 사찰의 역할을 하며 불교가 국교임을 천명하였는데 후삼국 통일을 기념하기 위해 같은 해에 현 논산시에 개태사를 창건하고 4년 뒤에 이곳에 개태사를 완공하였다. 

국가가 지향하는 방향을 알기 위해서는 국가 예산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보면 된다. 국가가 운영되기 위해서는 의미가 필요하다. 사람들은 희망을 보면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쇠락하여 빈 터만 남은 개태사지의 황량한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박물관에 있는 허리가 반쯤 잘린 석승의 모습은 일제강점기 유리건판 사진에도 살필 수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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