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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Jun 30. 2016

앵그리버드

스토리의 한계가 있긴 하지만

앵그리버드는 게임으로 유명한 캐릭터다. 요즘도 이 게임을 많이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국민게임이라고 불릴정도로 수많은 아이들과 성인이 이 게임에 푹 빠졌던 적이 있다. 매우 단순한 패턴으로 당기는 강약만 조절하고 방향 설정만 하면 끝나는 앵그리버드는 단순함 그 자체였다. 그러나 게임을 만드는 알고리즘은 생각보다 복잡하다. 대부분 수학과 물리학이 들어가는 부분으로 그 계산 없이는 앵그리버드의 재미도 없다. 


앵그리 버드에서 나오는 새들은 모두 날지 못하는 새다. 지구 상에 존재했던 퇴화하여 날지 못하는 새는 대부분 진화하지 못하고 사라져갔다. 지금 지구 상에 존재하는 날지 못하는 새의 대표적인 사례로 타조를 꼽을 수 있다. 날가가 퇴화된 대신 튼튼한 다리를 가졌기 때문에 살아남았다. 


살아남지 못한 대표적인 새는 인도양의 작은 섬 모리셔스에 살던 도도새로 먹이가 풍부하고 천적도 없는 환경에서 살았기 때문에 날가도 퇴화하고 빨리 달릴필요가 없어 다리도 발달하지 못했다. 어느 날 포르투갈 사람들이 그 섬에 도착했는데 날지도 못하고 잘 달리지 못 하는 도도새는 잡아먹혀 결국 멸종에 이르게 된다. 


앵그리버드에서 더 레드는 잘못된 것을 보고 못 참는 모난 성격으로 항상 화가 나있는 새이다. 그런 앵그리버드를 보고 다른 새들은 외면하고 따돌린다. 우리는 분노를 억누르라고 말한다. 분노는 나쁜 것이며 합리적인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조차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을 굳이 긁어 부스럼 만든다고 치부해버린다. 그런 생활을 하던 중 레드는 법원으로부터 분노조절장애라는 진단을 받고 치료를 받아야 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레드가 사회생활에 고립되어 갈 때 피그들이 마을로 들어온다. 형형색색의 볼거리와 다양한 이벤트로 새들을 현혹하면서 서서히 그들 삶에 침투해간다. 모든 새들이 좋아할 때 레드는 피그들이 이상하다고 마을 새들에게 경고하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새들은 무시한다. 결국 새들의 알을 몽땅 훔쳐서 피그들은 도망가서야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새들은 깨닫게 된다. 

모든 것을 항상 의심하는 태도는 바람직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합리적인 의심은 필요하다. 사람들을 보면 자신에게 잘해주는 사람에게 합리적인 의심조차 안 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에게 잘해주는 사람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상당수의 사람들은 무언가를 얻기 위해 상대방에게 잘하던가 자신을 꾸민다. 자신의 수입 대비 과분하게 좋은 차라던가 명품으로 치장하는 사람들을 보면 정상적인(?) 사람들의 비율은 적다. 누군가에게 있는 체를 하고 돈을 쓰는 이유는 분명히 있다. 

모두가 한 방향으로 가는 민주주의는 없다. 끊임없이 시끄럽고 문제가 제기되고 사람들의 목소리도 각각 다르게 나와야 하는 것이 민주주의이다. 그렇다고 해서 끊임없이 반목하라는 것이 아니라 합의하고 소통하고 하면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너무나 조용한 것은 큰 사건이 수면 아래에서 떠오를 시기만 기다리는 것과 비슷해 보인다. 사회의 불의에 대해서 침묵하는 것은 언젠가 자신에게 혹은 주변 사람에게 닥쳐올 불행한 사건을 키우는 것과 똑같다.


분노하는 새 레드는 다소 이질적으로 보이지만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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