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황의 죽음으로 본 삶의 대처
보통 어떤 인물에 대한 평가는 살아 있을 때보다 죽었을 때 이루어진다. 죽음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마침표이기 때문이다. 책의 마지막을 쓰기 전까지 언제라도 글의 방향 변경이 가능하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만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삶의 의지를 강하게 세우고 살아야 고통과 기쁨이 함께하는 삶을 살 수 있다. 삶에서 죽음까지 중요한 것은 그것뿐이다.
윤황은 자신이 살던 고택과 그가 묻힌 곳의 재실이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본관은 파평인 윤황은 자는 덕요이고 호는 팔송인 윤황은 인조 때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주화를 반대했었는데 이로 인해 유배를 받을 뻔했다고 삼사의 주청으로 면할 수 있었다.
논산시 노성면 장구리 52에 위치한 이 고택은 윤황 선생의 6대손 윤정진이 조선 영조 때 지금 자리로 옮겨 종가로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지금 후손이 살고 있지는 않은데 명재 윤증고택처럼 열린 공간이어서 그냥 가볍게 들러볼 수 있다. 고택의 구성은 안채, 사랑채, 광채 등 3채의 살림집과 사당 1채로 되어 있다.
보통 하루의 일은 예측할 수 있어도 1달 혹은 1년 후의 일을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보통은 일상대로 흘러가리라 생각할 뿐이다. 최근 코로나19의 변이만 봐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예전의 일상이 얼마나 의미 있는 삶이었는가를 다시금 느끼지 않은가. 윤황에게 있어서 청나라와의 관계는 인생에서 중요한 과제였다. 그는 척화파의 입장이었기에 당시 대세에는 거스르는 주장을 펼쳤던 사람이다.
삶을 살아가면서 실수를 안 하기란 쉽지가 않다. 윤황은 선조대에 문과에 을과에 급제해 관료생활을 하다가 1608년(광해군 즉위년) 북청판관으로 혼인한 자제를 거느리고 관아에 머물고 있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기도 했다. 광해군 대가 오래가지 않을 것을 알았는지 몰라도 시골로 은거해서 살다가 인조반정 이후에 다시 조정으로 나가게 된다.
뒤쪽으로 올라와서 내려다보면 윤황 고택의 배치가 보인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우측에 부엌과 안방이 있고 ㄱ자형으로 꺾인 안채에는 대청, 건넌방이 위치해 있다. 이제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윤황의 묘와 재실을 보기 위해 가본다.
재실은 묘소의 앞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만들어진 건물이다. 묘소의 앞에는 멋들어진 소나무가 운치를 더하고 있다. 이제 이렇게 묘소를 만드는 일은 없겠지만 옛날에는 풍수지리를 많이 고려했었다. 윤황 선생의 묘의 아래에는 윤황 선생 재실이 있으며 조선 현종 6년(1665)에 안채를 짓고 조선 숙종 21년(1695) 문간채, 서재, 동재를 건축하여 지금도 남아 있다.
비가 오는 날 찾아와서 그런지 색채가 조금 더 진해 보인다. 논산 윤황 선생 재실은 문화재자료 제391호 지정이 되어 있다. 그는 사후에 영광의 용계사우(龍溪祠宇), 영동의 초강서원(草江書院), 노성의 노강서원(魯岡書院)에 제향되었다.
삶에서 죽음까지 많은 굽이굽이가 있다. 윤황의 삶 역시 그러했다. 깨어 있는 삶이란 자신이 생각했던 방향대로 살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면서 삶의 신비를 느끼는 것이다. 그러한 감정은 진실성과 경이를 낳게 된다. 살아 있기에 살아가는 것은 죽음과도 다를 바가 없다. 살아 있기에 감탄하면서 매일 새로운 노력을 해보는 것은 그 강렬함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이 살아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