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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꿈

겨울 초입 공산성을 다시 오르다.

국가의 힘은 국민들에게 기회에 대한 관점으로 보면 된다. 국가가 경제력을 비롯하여 군사력을 갖추고 있으면 그 국가의 국민에게는 다양한 기회가 주어진다. 국민 개개인이 내는 세금은 그런 국가를 만들고 유지하기 위한 거름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대한민국에 사는 국민과 짐바브웨에 사는 국민들의 기회는 다를 수밖에 없다. 국가는 정치적으로 경제적, 군사적으로 균형점을 이룰 수 있어야 한다. 고구려의 역사는 필자에게는 단편적이다. 인물이나 역사적인 사건, 영토 확보 등은 잘 알지만 그 속살은 잘 알지 못한다. 복제된 광개토태왕비를 본 것외에 그 현장을 가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반면 백제라던가 신라의 역사는 익숙하다. 직접 가보고 그 역사의 현장을 보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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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역사를 보면 문화의 국가이면서 예술적인 느낌이 물씬 풍겨 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모든 문화나 예술은 경제적으로 풍족할 때 만들어진다. 백제가 위치했던 충청도나 전라도는 전형적인 곡창지대로 풍요로웠다. 반면 고구려는 풍족한 땅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고구려의 역사를 보면 마치 전형적인 전투 국가처럼 보인다. 마치 스파르타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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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에서 백제는 문화적으로는 몰라도 군사적으로는 고구려에 열세에 있었다. 가장 중요했던 한강유역은 고구려의 왕성한 정복군주 중 한 명이었던 장수왕에게 빼앗기게 된다. 대내외적으로 국난의 상황에서 즉위한 문주왕에게 선택권이 많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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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주왕이 웅진으로 천도한 것은 정치적·군사적·경제적 이해관계를 종합적으로 고려한 것으로 이곳 공산성이 바로 그 당시의 웅진성이다. 공산성에 올라서서 당시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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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유역에 있었던 백제가 그보다 작은 도읍으로 이전했다는 것은 선택권이 많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공주의 금강 물줄기가 작지는 않지만 한강이라는 큰 물줄기와 기반을 버리고 이곳에 도읍을 만드는 것은 쉽지 않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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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성을 오래간만에 올라가니 감회가 새롭다. 사적 제12호로 지정되었으며 둘레 2,200m의 웅진성(熊津城)·쌍수산성(雙樹山城)으로 불리기도 했던 곳이다. 64년간 백제의 도읍으로 새로운 도약을 꿈꾸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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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정말 중요하다. 국력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인지 알려면 해외를 나가보면 알 수가 있다. 가진 여권으로 무비자로 입국할 수 있는 나라가 많다는 것은 그 국가를 인정하고 국가 안에서 삶을 영위하는 국민들의 수준을 믿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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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흘러가는 금강의 물줄기가 보인다. 저 건너편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다양한 방법이 시도되었다. 철교가 있기 전에는 배다리가 있었다. 적지 않은 물자를 나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배를 이어서 위에 널빤지를 깔아 만든 것이다. 당연히 홍수가 생기면 쓸려나갈 수밖에 없었다. 공병대를 나오지도 않았는데 예비군 훈련 때 임시 다리를 만들어보아서 어떤 형태인지 잘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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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하게 생각되는 계절이지만 오히려 이런 때에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어서 좋다. 숨이 조금씩 막히는데 마스크 때문이라고 생각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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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지 않은 거리에 정자가 있다. 갑작스럽게 이곳 공주로 도읍을 이전했던 문주왕은 매우 복잡한 정치적인 상황에 처하게 된다. 천도 후에도 계속 실권을 장악하려는 왕족들과 귀족세력들 그리고 천도를 도왔던 해씨세력들이 있었다. 결국 문주왕은 재위 3년 만에 당시 정권을 장악한 병관좌평 해구(解仇)의 자객에 의하여 피살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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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꿈은 어떤 것이었을까. 이곳에 와서 성벽을 걸으면 짜릿한 느낌을 느낄 수 있다. 물론 안전하고 조심스럽게 걸어서 성벽을 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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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도 계속 발굴이 되고 있는 공주성에는 진남루(鎭南樓:南門)·공북루와 암문(暗門)·치성·고대·장대(將臺)·수구문(水口門) 등의 방어시설이 있으며, 동문과 서문의 터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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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많지 않을 때는 공주성에서 보이는 금강변에는 마치 섬처럼 육지가 드러나기도 한다.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저런 모습이 좋다. 이곳 만하루는 금강을 내려다 보고 있는데 역대 왕들은 만하루에서 이 풍경을 즐기기도 했지만 동쪽 누대에 해당하는 만하루의 군사적 기능을 더욱 중시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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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반대쪽으로 걸어서 와보았다. 웅진시대는 무령왕이 등극하기 전까지는 귀족들의 시대였다. 지방의 22 담로에 왕족을 파견하여 귀족 세력을 견제하도록 한 무령왕은 백제 꿈의 기반을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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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에는 흥망성쇠가 있다. 웅진시대의 중심이었던 공산성을 거닐면서 기술이나 물질적인 것을 제외하고 다르지 않았던 백제인들의 삶을 생각해본다. 성왕의 시대가 지나고 웅진에서 기반을 닦은 무령왕의 시대까지 새로운 백제를 열었던 그 시간을 기억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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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곡 없는 인생 없듯이 굴곡 없었던 역사적인 이야기도 없다. 공주에 자리한 공산성은 백제인들의 생각과 마음이 담겼던 곳이다. 백제는 고구려나 신라보다 안에서 밖을 지향했던 국가다. 현대 그리스어로 나는 메타포라를 하고 있다는 것은 안에서부터 바깥으로의 완전한 변화를 뜻하는 메타모르포오에서 비롯된 단어다. 백제는 메타포라처럼 자기 혁신을 통해 새로운 국가를 꿈꾸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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