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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Dec 11. 2021

청주읍성

일제가 지워버린 청주의 역사 공간

오랜 시간이 지나면 중심이 생겨나고 그곳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간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 지금은 조선시대처럼 자연스럽게 취락이 형성되지는 않았지만 한성 같은 경우는 정도전에 의해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도시이기도 하다. 역사 속에서 자연스럽게 도성이 만들어질 때 계획적으로 만들어졌던 사례가 많다. 부여, 경주역시 그러했다. 지역마다 중심을 이루는 공간은 바로 읍성이다. 읍성 내에는 관아와 객사가 생겨나고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살아가는 터가 만들어진다. 

일본이 한반도를 강점하면서 기존의 틀을 없애기 위한 방법으로 바로 지역의 중심 공간을 무너트리는 것이다. 당시 전국에는 적지 않은 읍성이 본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읍성 내에서 대부분의 상업활동이 있었다. 

오래간만에 왔더니 청주의 읍성이 자리했던 곳에 일부 성벽이 복원이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청주 정도의 규모의 도시에서 읍성이 복원되는 것은 쉽지가 않은데 의미 있는 발걸음이다. 

청주는 충청북도의 중심이 되었던 도시였는데 이곳의 읍성을 모두 헐어버린 것이 일제강점기 때다. 용두사지 철당간(국보 제41호), 중앙공원(충청병영), 청주시청 제2청사(청주 관아) 등 성안길 일원에 자리하고 있다. 성안길이라는 말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성의 안쪽 길이라는 의미다. 

당시의 규모로 볼 때 청주읍성은 상당한 규모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곳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영규대사와 조헌 의병장이 왜군을 상대로 처음 승리한 곳이기도 하다. 청주읍성은 조선 성종 18년(1487년)에 완공되었는데 길이 1783m로 사대문을 두고 위용을 보여주었던 곳이다.

청주읍성은 앞서 말한 대로 일제강점기 도시정비사업으로 1911년 강제 철거됐되었는데 당시 일제는 철거 과정에서 나온 성돌을 하수구 축대 정비나 도로 건설에 사용되었다. 

저 앞에 보이는 길은 천년의 사랑길이라고 명명이 되어 있다. 조선시대 이전까지 이 땅에 살던 사람들은 그 지역에 내려오는 설화나 전설 혹은 사람의 이야기로 지역 이름을 명명했지만 일본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중심을 정해놓고 서쪽, 동쪽, 남쪽, 북쪽에 이름을 정한다. 그 이름이 지금도 남아 있다. 대전을 예로 들면 중심의 중구, 서쪽에 서구, 동쪽에 동구 같은 방식이다. 


낙엽이 모두 떨어져 가는 이때에 옛 청주읍성을 상상하며 거닐어 본다.  

저 건물은 고려시대 청주 관아의 객사 동쪽에 있던 누각 건물로 취경루라고 불렀다. 청주에 남아 있는 목조건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역사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홍건적의 난 때 공민왕이 침입을 물리치고 궁궐로 돌아가다가 청주에 머무른 기념으로 과거시험을 치렀는데 합격자의 방을 취경루에 붙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한다.  지금은 한명회가 누각의 이름을 고친 망선루로 남아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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