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에서 전사한 양함을 모신 신충사
배움에는 시작은 있지만 끝이 없고 삶의 긴 여정 중에 한 부분이기도 한 학문의 지난한 과정은 작게 시작해서 끝이 없는 길을 걷는 것과 같다. 무언가를 배우는 데 있어서 시간의 제한이 있는 배수진이 있을 수는 없지만 전투에서는 왕왕 발생한다. 배수진은 역사 속에서 한신이 사용한 것으로 등장한다. 한신이 사용한 배수진은 바로 병사들을 사지에 몰아넣어 모두들 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게 만드는 전략이었지만 그에게는 대책이 있었다.
상월면은 전국의 많은 지역명이 그렇듯이 상도면(上道面)과 월오면(月午面)에서 ‘상(上)’자와 ‘월(月)’자를 따 상월면이라 하여 논산군에 편입된 곳인데 이곳에도 딸기가 유명하다. 골목골목마다 딸기가 탐스럽게 그려져 있다. 상당한 크기를 자랑하는 킹스베리도 좋지만 아직은 설향이 알차면서 달달한 맛을 선사해준다.
상월면은 지인이 많이 좋아하는 고구마가 많이 생산되는 곳이다. 일조량이 풍부하고 노성천의 상류지역으로 맑은 물과 넓은 들에서 재배되는 고구마는 말 그대로 소박한 맛을 담고 있다.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좋은 문구를 보는 것으로도 충분히 하루의 글귀를 담음이 있다. 상월면의 인물은 양함으로 25살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를 한 후 함창 현감으로 재임했었던 사람이다. 무과에 급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반도를 피로 물들인 임진왜란이 발발한다. 이때 관군을 거느리고 신립장군과 함께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왜군과 싸우게 된다.
이 건물은 전사청으로 양 함선생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어 유림의 산실로 행사를 진행해왔는데 오랜 세월에 건물이 낡은 것을 고유의 한옥으로 새롭게 건립한 것이라고 한다.
배수진은 죽고자 하면 살 것이요.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라는 의미로 무조건적인 생존 의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전략가의 대책이 필요한 전략이다. 충주 탄금대에서 신립장군이 왜 무모한 배수진을 쳤는지는 알려진 것이 많지가 않다. 한신의 배수진은 자기의 허점을 고의로 노출시켜 상대방을 유인하는 유인책에 불과했었고 그에게는 한 수가 있었다.
전사청의 건물 뒤로 신충사가 자리하고 있다. 날이 아직은 그렇게 춥지 않아서 걸어서 돌아볼만하다. 양함은 지휘관인 신립의 전략에 대응했지만 왜군들의 조총과 전략의 부재로 인해 전사하게 된다. 글을 읽을 때는 행간의 뜻을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며 대화를 할 때는 언외(言外)의 뜻을 파악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행위에서는 그 뒤에 숨어 있는 진의를 알아보는 지혜는 주요한 능력이다.
양함은 우국충정으로 출정하여 싸웠으나 전사하였고 후에 시신도 제대로 수습되지 못했다고 한다. 그 후 나라에서 국사를 보내어 신위의 위치를 정해주었고 자헌대부 병조판서에 추증하고 충신 정려를 내려 충의문을 건립하였다. 사당이 낡아 허물어지자 후손들이 신충사를 새롭게 건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상월면에 자리하고 있는 충신정려는 수백 년 동안 포양도 받지 못한 채 수 백 년 세월이 흐른 뒤 영조 5년에 묘비를 세우고 고종 23년에 건립하였다고 한다. 1971년에 쓴 신충사 현판이 사우 앞면 중앙에 걸려 있으며, 전체적으로 깨끗하게 정비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