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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Jan 07. 2022

Back to the past

2022년의 너머를 생각한다면...

개그 콘서트가 없어지고 나서 사람들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찾을 곳을 잊어버린 것에 아쉬웠던지 정치 콘서트가 열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어이가 없다가 이제는 재미가 있어지기 시작했다. 원래 바보들이 적당하게 정치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요즘은 너무 비슷해지고 있다. 대신 누가 되더라도 장차관이나 공사의 사장은 임명하는 권한은 주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백 투 더 퓨쳐가 아니라 백 투 더 패스트로 가고 있다. 우리는 과거로 돌아가는 경험을 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불안했던 시기에 인터넷 기반의 워크넷 활성화를 위해 일했던 적이 있다. 즉 고용노동부의 지역센터에서 일했던 경험이다. 당시에는 구인구직 앱이 없었다. 우리는 그 시대로 돌아가고 있다. 누가 말한 것처럼 이제 사람을 구하는 앱이 나올 예정인가 보다. 전라도가 곡창지대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야 할 이유는 대체 무엇인지 모르겠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먹고사는 문제만큼 중요한 것이 있을까. 전라도의 모든 지역이 곡창지대가 아니라 일부 지역(면적으로 보면 넓다)에서 쌀이 많이 생산된다. 


거대한 배를 이끌어가는 선장을 선택하는데 바보보다는 조금 덜 바보 같은 사람을 선택해야 하는지 혹은 잘못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과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는 사람을 선택해야 하는지 정말 재미난 정치판이다. 스스로는 논리적이라고 생각했던 페미니스트도 자신이 뭘 지향하는지 모르고 프로파일링을 자신만의 관점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사람들이 보수를 이야기할 때 유학을 언급하는데 진정한 유학자는 그렇게 고리타분하지 않다. 어설프게 배운 사람들 혹은 그럴 거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그럴 뿐이다. 한국의 기업은 정말 통찰력 있는 사람을 원하지 않는다. 피곤하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는 보수는 보수가 아니라 그냥 꼴통(?)이지 않을까.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여당이 분리되어 진보와 보수로 갈라지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한국은 투표로 정치인을 뽑지만 과연 유권자의 의지를 대변하는가를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국회의원을 뽑을 때 투표율과 당선되기 위한 득표율을 계산해보면 대략 25% 정도의 사람만의 투표로 결정된다. 선거에서 진 후보자의 득표는 사표가 된다. 게다가 자신이 지지하고 싶은 사람이 차마 없어서 투표를 하지 못한 사람, 관심 없는 사람들 등 70%가 넘는 사람들은 의도치 않게 끌려간다. 


시대를 막론하고 국민과 백성을 가장 많이 언급하는 사람 중에 정말 그들의 삶을 대변하고 싶은 사람은 없다. 국민이라고 말하고 자신의 이해관계라고 해석한다. 왜냐면 자신을 찍은 일부 사람들은 이해관계가 같기 때문이다. 같은 생각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정보가 이렇게 넘쳐나는데도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더 많이 배척하고 있다. 맞춤 채널이라는 플랫폼 기업들은 같은 생각을 콘텐츠만 보여주고 있다. 


기술의 발전이 모든 것을 바꾸고 있다. 반면 디지털 난민들도 생겨나고 있다. 노인계층은 이제 사라져 가는 대면 은행 지점으로 인해 소비생활과 현금의 활용도 쉽지 않다. 그렇다면 현금을 거의 쓰지 않는 나라 스웨덴이나 모든 것이 디지털화된 중국의 사례를 살펴보는 것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중국은 안면인식을 통해 결제도 가능하다. 아마도 생체인식을 통한 결제나 은행을 활용하는데 대안이 될 수 있다. 꼭 지역마다 있어야 하는 것이 있다. 바로 행정복지센터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행정복지센터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쓸데없는데 예산을 쓰지 말고 그 공간을 활용하는 것도 좋다. 


일자리 문제의 해결방법 또한 과거에서 찾지 않았으면 좋겠다. 절대 정부는 양질의 일자리를 공무원 말고는 만들 수가 없다 그렇지만 선거에 나오면 흔히 말하는 것이 일자리수의 보장이다. 일자리는 민간에서 만들어져야 하고 한국의 현실을 반영해서 법으로 일부 불공평한 구조를 바꾸어야 한다. 정부에서 임시로 만드는 일자리는 의미 없는 시간의 일자리뿐이 없다. 


지금까지 창업과 관련된 예산, 특성화고등학교, 창조경제, 재교육과 관련된 예산 등을 보면 보수, 진보를 가리지 않고 그냥 이름만 바꾸고 재탕, 삼탕 해가면서 나오고 있다. 사회구조는 바뀌지 않았는데 위에 드러난 것들만 임시방편으로 덮기에 급급하다. 


자신의 취향과 상관없이 한국의 사람들은 1등을 비판 없이 무조건적으로 좋아한다. 노력한 만큼 모든 것을 가져간다는 것이 공정한가. 아직도 그런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지금의 정치판을 만들었고 보기에만 그럴듯한 공약을 만드는데 일조를 하고 있다. 어릴 때부터 팝송을 좋아해서 빌보드 차트 순위의 음악을 즐겼지만 마이클 잭슨 이후에는 빌보드 차트를 보고 선택해본 기억이 없다. 언제 적 빌보드 차트야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BTS로 인해 빌보드 차트가 계속 언급되고 있다. 지금 빌보드 차트를 보고 음악을 선택하는 사람의 비중이 얼마나 될까. 


언제까지 한국계를 언급하는 언론을 봐야 할까. 외국에 살면서 그냥 거기서 나름의 개인적인 성공을 거둔 사람일 뿐이다. 아직도 백인 우월주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축구를 좋아하면 그냥 방송을 보면 된다. 왜 공공의 주파수를 할애하여 손흥민의 소식을 시시각각으로 들어야 할까. 손흥민이 코로나19에 걸렸던 말던간에 그게 뉴스가 된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사회 구조적인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개인의 차이와 불행 혹은 삶의 힘듬을 자신에게 돌리는 사람이 많다. 상위 10%가 부의 과반을 가져가고 하위 50%가 5%남짓의 부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건물주를 찬양한다. 정부와 언론, 정치가 보여주는 것을 잘 보면 어떻게 왜곡된 사회의 문제에 눈을 돌리지 않게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언론들은 비극적인 살인사건이 일어나기만을 바라는 것처럼 보인다. 범죄자는 합당한 처벌을 받으면 된다. 그걸 지속해서 중계하는 것이 과연 사회에 긍정적인 효과가 있을까. 여론이 들끓으면 정치인은 어설픈 법안을 만들고 통과시킨다. 법도 논리적인 글이다. 논리가 어설픈 법안은 안 하니만 못하다. 


마음의 풍요는 물질적인 것도 중요하지만 정신적인 풍요가 기반이 되어야 한다. 정치적인 풍요는 국민들이 가지고 있는 정치관, 사회관 세계관이 반영된 정치인을 뽑는 데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민들 스스로가 승자독식주의가 아닌 기회와 공존의 사회를 선택해야 한다. 그것이 Back to the past가 아닌 Back to the fucture로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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