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헌 2만 점이 발견된 모덕사
역사나 인물에 대해 글을 쓰다 보면 가장 많이 쓰는 표현 중에 하나가 "기록에 따르면"이라는 것이다. 없는 이야기가 아니라 사실에 근거해서 말하는 것이다. 지금과 달리 기록으로 남길 수 있는 것이라고는 종이, 비석 등에 불과했던 옛날에는 사라져 버린 것들도 많다. 지금이야 대부분의 기록이 디지털의 형태로 기록이 되고 한번 만들어지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퍼지게 된다. 자신이 남긴 기록에는 숨기려야 숨길 수 없는 자신의 가치관과 생각, 그 발걸음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런 기록은 결국 자신의 생각이 되고 공개된 공간에서 포장해서 말하려고 해도 드러나게 되는 법이다.
자신의 가치관과 신념이 법에 재촉받지 않는 이상 겉으로 드러나서 공개적으로 질타를 받는 경우는 많이 없다. 보통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은 국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알을 계속 깨면서 다른 세상을 경험해보지 않는 이상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같은 관점을 가지게 된다. 사회지도층이 될 사람이 스스로를 계속 깨고 살고 있는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 벗어나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서 편향적인 생각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본다면 소수를 대변하게 된다.
이날 청양의 모덕사를 찾아간 이유는 모덕사에서 면암 최익현의 개인적인 기록이자 공공문서인 고문헌 2만여 점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에 발걸음을 해보았다. 입구에서 임인년 2022년 새해 복 많이 받으세호(호랑이의 해)라는 문구가 보인다.
2002년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앞에 2가 더 붙어서 2022년이 되었다. 모덕사의 안쪽에는 저수지가 있는데 이곳에서는 낚시를 하는 사람들을 가끔 볼 수 있다. 모덕사 안쪽이 아니라 바깥쪽 저수지에서다.
이번에 발견된 고문헌류는 5개의 나무궤짝 안에 수북이 쌓인 상태로 발견됐으며, 면암 선생이 충청도 신창 현감 재직 시 작성한 공문서, 중앙 관료 생활 때의 기록, 선생의 교우관계와 사상을 엿볼 수 있는 간찰, 제주도와 흑산도 유배 생활 시 남긴 기록이 다수 포함되었다고 한다.
모덕사에는 사당과 영당, 안채, 중화당, 춘추각, 대의관 등이 있는데 면암 선생은 조선 후기의 대학자자이자 의병장으로 선생의 항일투쟁과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기 위한 영정과 위패는 지난 1914년 건립된 문화재자료 제152호인 이곳에 봉안되어 있다. 이곳이 바로 최익현의 고택이 자리한 곳이다.
살면서 개인의 기록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남게 된다. 일반적으로 일기라는 것을 쓰면서 남기기도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매일매일 근면하게 자신의 기록을 남기는 사람은 많지가 않다. 모덕사에 자리한 겨울 고택 모습은 이렇다.
면암 최익현의 삶을 보면 죽지 않을 용기와 죽음에 나아가는 용기가 무엇인지 볼 수가 있다. 당대의 관점으로 보면 역사는 그 시대를 명확히 비추지 못한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지금에서 바라보는 거울은 후대에는 다르게 평가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수시로 옛 거울을 닦아 오늘을 비춰 보아야 한다.
당시 사용했던 가재도구들이 남아 있다. 개개인에게도 옛 거울을 비춰보기 위해서는 자신의 엣 기록을 살펴보는 것이 좋은 방법이다. 그래서 기록을 남기는 것은 개인에게도 일관성 있는 길을 걷는데 도움이 된다.
면암 최익현에게도 개인적이 삶이 있었고 관리로서의 공적이 삶도 있었다. 일제가 강압적으로 나라를 빼앗아 가기 시작했을 때 그는 시대변화에 부응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보였을 수도 있다. 지난 3일 후손이 직접 사용하던 12폭의 수묵화 병풍은 면암 선생의 일대기를 그린 작품이 나왔다고 한다. 자신의 의지를 굳건히 하며 일본에 적극적으로 항거했던 최익현은 일제에 의해 머나먼 이국땅 대마도에서 스스로 숨을 거두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