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씨행단의 고불 맹사성이 걸은 길
음악을 진정으로 좋아하는 사람 치고 악한 사람은 없다. 부모가 아이에게 메시지를 줄 때 자신이 직접 실천하는 것만큼 좋은 것이 없다. 그런 사람은 물론 많지가 않다. 자신을 싫어하면서 아이에게는 시킨다. 많은 사례 중에서 한석봉과 어머니의 이야기가 있다. 석봉에게 공부에 정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불을 끈 캄캄한 방에서 어머니는 떡을 썰고 석봉은 글씨를 썼다. 불을 켜고 보니 어머니가 썰어놓은 떡은 가지런했고 석봉의 글씨는 삐툴거렸다. 물론 공정하지 않은 게임이다. 어머니는 떡을 만져보면서 썰을 수 있었고 석봉은 아예 보이지 않은 종이에다 쓴 것이다.
겨울눈이 녹기 전에 아산의 맹씨행단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서 찾아가 보았다. 역시 이곳은 충남에 많지 않은 집성촌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맹(孟)씨는 중국 노나라로부터 계출된 성씨인데 고려 충렬왕 때 예부전서(禮部典書)을 지낸 맹가의 51세손인 맹의(孟儀)를 1 세조로 하여 맹의의 손자 맹희도(孟希道)가 고려 공민왕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한림어사(翰林御史), 수문전 제학(修文殿提學), 한성윤(漢城尹) 등을 지냈고, 맹희도의 아들 맹사성(孟思誠)이 조선 세종 때 우의정, 좌의정을 역임하여 맹씨의 핏줄이 자리 잡았다.
아버지 맹희도는 고려의 충신으로 남아 조선에서 벼슬길을 하지 않는다고 아들에게 말했지만 아들은 조선에서 벼슬하는 것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고불 맹사성 기념관에는 그의 행적을 알 수 있는 다양한 자료와 이야기가 있다. 맹 씨가 사는 은행나무 단이 있는 집으로 맹고불의 고택, 구괴정, 쌍 행수 등을 망라하여 "맹 씨 행단"이라 부르게 된 것은 왜일까. 맹사성의 삶을 보면 도를 따랐음을 알 수 있다. 도는 자연을 본받으며 도라고 부를 수 있는 도는 참된 도는 아니며, 이름 붙일 수 있는 이름은 참된 이름이 아니라는 노자의 문구가 있다. 알쏭달쏭하다. 그러나 곱씹다 보면 이해가 된다.
빈부라던가 형식 그리고 사람에 따라서 구분하지 않았던 맹사성은 세종대왕에게 장영실에게 벼슬을 내리는 것에도 찬성을 했었다. 당시 비천한 장영실에게 벼슬을 내리는 것에 많은 관료들이 반대를 했었다.
피리를 불면서 소를 타고 다니는 것으로 상징되는 맹사성의 모습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음악에 남다른 역량을 가지고 있었는데 조정의 의례에서도 음악에서 남다른 역량을 발휘하여 주연을 베풀 때 음악 연주를 지도하였다고 한다.
맹사성은 학문에도 소질이 있었지만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서 악기를 제작하던가 새로운 악보 체계를 만들었는데 아악과 향악의 적절한 조화를 만들어냈다.
청백리(淸白吏) 맹사성(孟思誠, 1360 ~ 1438) 집안의 고택(故宅)을 보기 위해서 이 문을 지나가면 된다. 문의 안쪽에 잘 정비된 고택의 실루엣이 보인다.
처마는 홑처마이고, 지붕은 중앙에 용마루를 가로지르고, 이를 다시 양쪽 방 위의 지붕 용마루가 받아 전후면에 박공을 낸 맞배지붕을 이루고 있는 맹사성의 고택은 격식이 있지만 소박한 고택 그 자체다.
정면 4칸, 측면 3칸의 ㄷ자형 평면 집의 기단은 막돌허튼층쌓기의 낮은 기단으로 네모뿔대의 초석(礎石)을 놓아 네모기둥[方柱]을 세웠는데 살미[山彌]는 앙서[仰舌]로 되었는데 이들의 모양은 조선시대 초기의 공포를 닮았다.
물의 철학은 낮은 곳으로 흘러서 바다가 되는 것이다. 만물을 이롭게 한다는 것은 약한 것을 돌본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약한 사람이 그 수에 있어서 다수이고 약한 사람은 백성이다. 강자의 힘은 결국 다수의 백성들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 힘은 개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나오는 것이며 그 힘은 원래 약자의 것이다.
고택에 서서 심어져 있는 오래된 거목인 은행나무를 바라보았다. 하늘 높이 올라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물을 흡수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삼투압으로 인해 어렵지 않게 가지 끝까지 올릴 수 있다. 쉬지 않고 흐른다는 것은 계속해서 변화하고 생각한다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