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에 자리한 동오 신홍식 선생의 묘
우선 글의 제목이 친일의 향기라고 해서 오해의 여지가 있을 수 있어서 언급한다. 삼일절에 찾아가 본 동오 신홍식 선생은 1919년 삼일 독립운동 당시에 가장 먼저 민족대표 33인중 1인으로 참여의사를 밝힌 분이다. 태화관에서 열린 독립선언식에도 참석하는 등 민족대표로서 적극적인 가담을 한 사람이다. 조선을 조선사람의 조선으로 회복해야겠다는 외침을 하며 당당하게 독립의지를 피력하였는데 이로 인해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경성감옥에서 보냈다고 한다.
동호 신홍식 선생의 묘는 청주의 가덕면 행정복지센터에서 건너편으로 올라가는 길이 보인다. 일제 강점의 역사는 정말 큰 변화를 만들어냈다. 정신보다 물질 우선 주의와 중용보다는 이념의 시대를 오랜 시간 고착화시켰다. 친일의 향기는 단순히 친일파의 문제로 끝난 것이 아니라 사회 곳곳에 그 썩은 고름을 만들어냈다. 돈이 된다고 하면 무슨 일이든지 하는 사람들이 곳곳에 넘쳐난다. 유튜브만 보더라도 자극적인 콘텐츠 일색이다. 그들에게 좋은 정보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특히 역사를 왜곡하면서 피해자를 공격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대한민국 역대 정부 중에 역사관을 제대로 세우겠다는 정부를 본 기억이 별로 없다. 교육정책은 수없이 바뀌었지만 좋은 학교에 어떻게 갈 것인가의 방법론만 수없이 바뀌었을 뿐 무엇 때문에 배워야 하는지에 대해 가치관이 있는 정책은 없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나온 사람들이 과연 제대로 된 역사관을 가질 수 있을까. 좋은 대학을 가는 것 외에는 아무런 비판의식이 없다. 역사를 가르치는 것을 보면 기가 찰 정도다. 일명 1타 강사라고 하는 이들의 역사교육은 점수는 잘 맞게 해 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수준을 평가하는 것조차 창피할 정도다.
일본이라는 나라를 여행을 자주 가보았지만 그들의 정신관은 좀처럼 이해하기 힘들 때가 있다. 겉으로는 참 공손하고 예의 바른 것 같지만 빼 속까지 강자에 대한 복종심이 자리하고 있다. 그들의 세계관은 일제강점기에 이 땅에 그대로 전달되었다. 일류대학, 승자, 강자에 대한 복종 그리고 약자에 대한 우월감은 무슨 일을 하더라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저변에 자리 잡고 있다. 친일을 해서 친일이 아니라 일본처럼 생각하는 모습의 향기가 이 땅에 뿌리 깊게 박혀 있다.
우리는 약자에 대해 배려라던가 측은한 마음을 가진 것에 대해 매우 인색하다. 독립운동가들의 흔적을 찾아가다 보면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람이 훨씬 많다는 것을 보게 된다.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는 1918년 국외에 있던 독립운동가들이 한국의 독립을 선언한 글로 조소앙이 집필했다. 힘들게 만들어진 글이다. 이 글이 만들어지는 데에는 사실 전혀 상관없어 보였던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가 큰 역할을 했다. 자결이라고 하니까 무언가 심각한 것 같지만 한자 그대로 스스로 결정한다는 의미다.
친일의 향기를 뿜는 극우 유튜버들의 주장도 해괴하기만 하다. 사람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살아가지 꼭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최선의 길은 아니다. 그들은 돈을 많이 벌었기에 열심히 살았고 가난하면 열심히 살지 않는다는 기괴한 논리를 내세운다. 돈만 된다면 뭐든지 다하는 것은 사회적 지위나 직업에 상관없이 곳곳에서 행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잠시 신홍식 선생의 묘에서 앞을 쳐다보니 탁 트여 있는 것이 참 좋다.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호는 동오(東吾), 초명은 홍식(弘植)인 신홍식은 1872년 3월 1일 충북 청주군 문의면(文義面) 문산리(文山里) 25번지에서 태어났다. 한학을 공부하여 13세 때 시율을 지을 정도가 되었고 16세 때 사서삼경에 능통하다는 소리를 들었으나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되고 동학농민운동 이후 사회 ・ 정치적 혼란이 심화되면서 ‘출세’의 기회가 없어지자 방탕한 생활을 했지만 나이가 들어 독립운동에 매진한 덕분에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다가 1939년 3월 18일 인차리 자택에서 향년 67세로 별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