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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Mar 13. 2022

태종 이방원

드라마 촬영장과 왕자의 난의 조연 이방의

공중파 방송에서 하는 드라마 중 거의 유일하게 보는 드라마가 바로 태종 이방원이다. 우선 이방원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잘 알기도 하지만 그가 추구했던 정치적인 행보와 한 번 결정했을 때 어떻게 대처하는지에 대해 잘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에서 과거에 급제한 유일한 왕이며 문과 무를 균형적으로 겸비했던 사람이지만 조선왕조 초기에 피를 가장 많이 보았던 사람이기도 하다. 결단도 빠르고 그만큼의 행보도 뒤따랐다. 그가 흩뿌린 피가 있었기에 세종 같은 성군이 나올 수도 있었다. 

문경새재는 수없이 가본 곳이며 안쪽에 자리한 드라마 세트장은 눈감고도 돌아다닐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한 곳이다. 지인과 같이 와서 돌아보기도 했던 곳이다. 드라마 태종 이방원은 바로 이곳에서 대부분 촬영되고 있다. 도성과 양반가문의 집이 잘 표현되어 있어서 문경에서 드라마 촬영이 많이 되는 곳이기도 하다. 

태종 이방원은 고려 말의 충신인 정몽주뿐만이 아니라 건국공신인 정도전까지 모두 제거하며 조선왕조의 기틀을 자신의 중심으로 자리 잡게 했다. 이성계는 장성한 왕자들이 특히나 많았다. 권력의 정점에 있는 사람에게 왕자들이 많다는 것은 권력다툼이 생길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방원은 신의왕후 한 씨의 다섯째 아들로 왕위 순위에서 먼 인물이었지만 그의 야심은 모든 형제를 뛰어넘었다. 

방원의 형제 중에 형인 이방의가 있었다. 셋째로 태어났는데 1398년 (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동생인 방원을 도와서 배다른 형제뿐만이 아니라 정도전을 제거하면서 정사공신 1등에 책록 되었다. 그 후 1400년에 일어난 같은 핏줄의 형제의 난인 제2차의 난 때 방원의 편에 서서 방간을 제거하는데 앞섰다. 그리고 좌명공신 2등에 책록 되었다. 

논산의 벌곡면 조령리라는 마을에 가면 익안대군 이방의의 손자인 백파 도정공 이상 선생의 영정을 모신 곳이 있다. 현재 백파 이상 영당은 충청남도의 문화재자료 제396호로 지정되어 있다. 오래간만에 내리는 비로 인해 확실히 봄의 냄새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백파 이상영당은 조령리라는 마을의 북쪽 야산 남향사면에 자리하고 있다. 후손들이 영당을 건립하였다고 하는데 그 건립연대는 확실하지는 않다.  이 건물의 기둥은 원주가 사용되었고 이익공계의 건물이다. 이방원과 수양대군은 어떤 면에서 보면 상당히 닮아 있다. 수양대군은 태종의 손자인데 태종의 형인 익안대군 방의의 손자와 다른 길을 걷는다. 이상은 수양대군이 단종을 폐하고 왕위에 오르자 사육신과 더불어 단종 복위 운동을 하다가 역모로 몰려 행방불명되었다. 

조용한 마을에 자리한 백파이상영당은 좌측으로 돌아가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영당의 동측에 이현동의 재실인 승무재(繩武齋)와 관리사가 위치해 있으며 조선시대의 건축양식이 비교적 원형에 가깝게 잘 보존되어 있다. 승무재는 1730년대에 건립된 건물로 추정하고 있으나 기록이 없어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다고 한다. 

이상의 아들인 이현동은 아버지의 행방을 모른 채 초상화만을 들고 이곳 벌곡면 조령리에 정착하여 살았다고 한다. 세조는 이상의 아들인 이현동을 등용하려고 하였으나 농맹아 행세를 하며 끝까지 거절하며 이곳에 묻혀 살았다고 한다. 이현동은 이후 논산 충곡서원과 조정서원에 배향되어 그 뜻을 기리고 있다. 

이곳의 승무재는 상량문에 쓰인 '승정기원후임자사월이십오일'이라는 기록에 따라 1672년 (현종 13)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현동은 연산면 조령에 은퇴하여 평생을 북쪽을 향해 앉는 일이 없고 자녀들에게 조선에서 벼슬을 하지 말도록 경계하였다. 승무재는 이현동의 재실이다. 

같은 핏줄이지만 형과 동생이 걷는 길이 다르고 언니와 동생이 전혀 다른 것을 보면 세상 삶이 묘하다고 느낄 때가 있다. 논산 전주 이 씨가 자리 잡게 된 것은 바로 익안대군 이방의 후손들이 이곳에 정착하면서부터다. 

이상의 제사를 지내고 있는 백파이상영당(白波李常影堂)의 백파는 흰 거품이 이는 물결이라는 의미다. 조선왕조의 격변의 시기에 정치에서 거리를 두었던 두 명의 부자는 세상 속 욕망이라는 그림자에서 벗어나 자신을 성찰하고 존재의 근원으로 돌아가 쉬는 것, 바로 완전한 쉼을 청했던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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