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 다산초당의 정약용을 만나는 길
언택트라는 단어는 접촉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런데 어떻게 만남이 가능할 수 있을까. 바로 이 시기가 언택트 만남이 더 좋은 시기이기도 하다. 우리는 현재 살아있는 누군가와 만나는 것만을 중요시하지만 현시대에 존재하지 않는 누군가의 만남은 거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과거에 살았던 사람을 만나는 것은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데 있어서 중요한 포인트가 되어주기도 한다.
매화, 산수유등 뻔한 봄꽃 나들이에 지쳤다면 과거의 인물을 만나는 여행은 어떨까. 생각을 담아볼 수 있는 이색적인 코스니까. 코로나19 시국에 소문나면 붐비는 곳보다는 한적한 곳이 더 마음이 편안하다.
정약용은 매일매일 이 길을 내려와서 차를 마시러 갔다고 하는데 번다한 일이지 않았을까. 사람은 매일매일 해야 되는 일들이 있다. 그걸 어떻게 할지를 고민하는데에서 재미를 느낄 수가 있는 것이다.
지금은 한참 옆으로 공사 중이어서 돌계단을 밟고 올라가 본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 도시 경영의 세계적 이슈 가운데 하나는 도보 생활권 중심 도시 구축이라고 한다. 숲을 보고 호수를 볼 수 있는 길은 단순한 보행편의성뿐만 아니라 도시 쾌적성 증진, 탄소중립 기여, 도심 내 유동인구 확보에 따른 지역경제 활성화까지 이어질 수 있다.
다산초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 조선 후기의 대표적 사상가인 정약용(丁若鏞)이 1801년(순조 1) 신유사옥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귀양 와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중, 1808년에 윤규로(尹奎魯)의 산정이던 이 초당으로 처소를 옮겨 1818년 귀양에서 풀릴 때까지 10여 년간 생활한 곳이다. 지금의 고택은 1958년에 신축한 것이다.
좌측으로 올라오면 정석이라고 정약용이 새겨놓은 글귀가 보인다. 경내에는 정석(丁石)·약천(藥泉)·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다조(茶竈) 등 다산의 유적이 보존되어 있다. 다산은 이곳에 정석을 새기면서 이미 이름 내지 않으려는데 왜 이름을 내는가? 없어지지 않을 이름이라면 이름을 내지 않더라도 크게 이름날 것이요, 없어질 이름이라면 이름을 내더라도 홀로 널리 알려질 수 있겠는가? 이름나나 이름나지 않으나 그것이 그것이로다라고 주석을 남겼다.
정약용은 백성을 위해 임금이 있고 목민관이 있는 것이지 임금이나 목민관을 위해 백성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모든 권력의 원천인 천명(天命)은 백성의 마음이며, 천명이 떠나면 왕과 왕조는 망한다고 보았다.
이곳에서 차를 끓여 마시기도 했다고 한다. 사람이 걸어야 할 길이 있고 자제해야 될 길이 있다. 모든 욕심은 자신이 편하게 살고자 함에서 나오기 시작한다. 자신이 편하게 살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노력을 가져와야 하기 때문이다.
정약용은 마음이 울적할 때면 다산초당 뒷길을 따라 백련사로 넘어가 제자인 혜장과 격의 없이 논어 맹자 주역을 이야기하고 시와 그림을 짓고 그렸다. 이야기할 것들이 많다. 그는 홀로 유유자적하게 살 수 있었건만 그렇게 백성의 아픔을 안타까워했을까.
작은 연못이 다산초당 옆에 자리하고 있다. 돌도 하나 던져본다.
다산초당에서 백련사로 이어지는 1km 정도의 동백나무 숲길은 하늘이 보이지 않을 만큼 우거져 있다. 저곳은 자신을 찾아온 손님을 맞았던 곳이라고 한다.
이곳까지 올라오면서 살짝 숨이 가팔라졌다. 다산초당의 대청에 앉아서 잠시 숨을 돌려본다. 긴 시간은 아니지만 정약용과 언택트 만남을 해보았다. 온전하게 그의 생각을 다 읽을 수는 없었지만 미루어 짐작은 해볼 수 있었다.
‘백성들 뒤주에는 해 넘길 것 없는데/ 관가 창고에는 겨울 양식 풍성하네/ 가난한 백성 부엌에는 바람, 서리뿐인데/ 부잣집 밥상에는 고기, 생선 가득하네/' - 기민시(飢民詩)
언택트 만남을 하기 좋은 시기라고 생각한다면 그 생각과 삶을 되돌아볼 수가 있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할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다. 누군가가 지나가면서 성공도 하고 실패도 하고 즐거워하고 슬퍼하는 것에 대해 살펴본다면 당신의 인생에서 모색이 길의 가능성을 넓혀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