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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Mar 26. 2022

노예 12년

현재, 자유로 가는 속도는 얼마나 될까? 

현재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고 살아갈까. 격차를 의도해서 만들고 그것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며 선택의 제한은 더욱더 커지는 듯한 느낌이다. 우리 모두는 선택에서 자유롭지 못하지만 자신의 의지에 의해 인생을 살아가려고 한다. 그렇지만 쉽지 않은 것도 현실이다. 국가라는 거대한 공동체가 있고 그 안에 지역사회와 일자리가 얽히고설켜서 살아가고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격차가 더 벌어질수록 선택의 폭은 좁아진다. 어떻게 보면 현대를 살아가지만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노예와 같은 삶이 대부분 일지 모른다. 


1800년대의 실화이기도 하면 1850년대에 자신의 책을 저술하여 노예 전쟁의 씨앗을 발아시킨 주인공 솔로몬 노섭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 영화 노예 12년은 온전하게 노예의 삶이 인정되던 시대였다. 1840년대에 미국에서는 노예 수입이 금지되었다. 부족한 노동력을 구하기 위해 백인들이 취한 방법은 바로 불법으로 흑인을 납치해서 재산처럼 팔아넘기는 것이다. 특히 목화 노동인력이 필요하지 않아 흑인에게도 자유가 주어졌던 북부의 일부 주의 흑인들을 데려가다가 팔면 적지 않은 돈을 벌 수 있었던 시대였다. 1841년 가족을 이루고 자유로운 삶을 누리던 음악가 솔로몬 노섭은 워싱턴에 갔다가 납치를 당하게 된다. 

이유를 알 수 없게 납치를 당한 뒤 몇 번의 거래 과정을 거쳐 솔로몬 노섭은 플랫이라는 이름으로 바뀌면서 루이지애나로 끌려가게 된다. 아는 것이 많아도 모르는척하고 살아야 하고 글을 모른 체하고 살아야 죽지 않을 수 있는 시대다. 12년이라는 시간 동안 솔로몬 노섭은 두 명의 주인을 만나게 된다. 한 명은 자애롭기는 하나 노예제도를 부인하지 않는 주인인 월리엄 포드이고 한 명은 자비라곤 찾아볼 수 없는 애드윈 엡스로 악몽의 세월을 보내게 된다.   

소중한 자유를 만끽하며 살던 솔로몬 노섭은 한순간의 판단 미스로 자신의 자유를 박탈당하게 된다. 현대인 역시 자유를 누리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먹고사는 생존의 문제에서는 현대적인 개념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다. 피라미드 형태로 만들어진 경제시스템에서 일한 만큼 번다고 하지만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은 당장 한 달만 벌지 않아도 생존의 위협에 직면하게 된다. 


인생에 한 번이라도 자유를 박탈당할 생각도 하지 못했던 솔로몬 노섭은 생각지도 못하는 악몽이 현실이 된다. 그것도 무려 12년이라는 세월 동안 말이다. 현대판 노예라고 하면 플랫폼 기업에 자유의지(?)로 사는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현재의 산업에서 사람의 존재는 돈을 벌기 위한 부속품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조선시대의 노비도 양반 댁에서는 재산목록에 속해 있었다. 누군가에 빚을 지면 그걸로 변제할 수도 있고 삯을 주긴 하지만 노동의 대가라고 보기에는 형편없이 작기 때문에 수익을 창출하는 주요한 수단이기도 하다. 남북전쟁 이전까지 미국에서 역시 흑인이 주가 된 노예 시장에서는 노예는 재산이었다. 백인이 노예가 되는 경우가 있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관리자의 입장이 강했고 주된 재산은 흑인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값어치를 매기는 중개상인이 존재했고 이들을 갈고닦아서 시장에 내놓으면 누군가는 돈을 내고 사간다.  

자비로운 주인이면 괜찮을까? 부당한 시스템이라도 그곳에 묻어가는 수많은 대중들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내부 고발자를 몰아가는 우리 사회 시스템에서는 수많은 자비로워 보이는 윌리엄 포드가 그 속에 존재하는 느낌이다. 잘못된 제도 혹은 시스템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고쳐야겠지만 편안함을 포기할 용기는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과거와 현재에도 있다.  


모든 노예는 자신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에드윈 엡스 자비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다. 여자 노예는 자신의 성해 소 대상 외에 다른 의미는 없다. 채찍을 잘 활용하고 변덕스러운 성격 덕에 변태스러운 취향까지 가지고 있다. 자신이 성경에 나오는 자애로운 사람이라고 착각하고 살지만 모든 사람이 그를 교활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자비 없는 그의 행동 때문에 솔로몬 노섭은 자유를 찾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하게 되고 결국 12년 만에 자유를 얻게 된다. 


결국 솔로몬 노섭은 자유를 찾았지만 남겨진 노예의 비참한 삶이 여운을 남긴다. 백인들을 위해 만들어진 여흥의 자리에서 영혼 없는 춤을 추는 흑인들과 바이올린을 켜는 솔로몬의 눈동자에서 희망 없음에 인간이 가진 잔인함이라는 내면의 거울을 보게 된다. 이 영화는 과거에 암울했던 미국의 노예시대를 그리고 있지만 현대에서도 반복되고 있지 않을까란 생각을 한다. 노예제도를 타파하기 위해 노력했던 솔로몬 노섭이 죽은 지 150년도 지난 지금 노예는 아니지만 먹고사는 것을 이용하는 교활한 인간들을 보면서 인간의 시대가 끝나지 않는 이상 노예 12년은 반복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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