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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Mar 27. 2022

아버지의 그늘

화성에 자리한 덕흥대원군의 공간

다른 국가나 한국의 역사 속에서 가문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누군가의 부모, 남편, 부인의 모습은 자신의 선택이며 끝까지 따라다니는 굴레일 수도 있다. 그래서 사람을 잘 선택해야 된다는 말이 나오기도 한다. 그 사람이 살아온 모습은 본인이 아닌 다른 사람에 의해 평가받기도 한다. 조선왕조의 역사 속의 전시기에 걸쳐 4명의 대원군이 있었는데, 선조의 아버지 덕흥군을 대원군으로 추존한 것이 처음이었다. 

화성시에 가면 최초로 덕흥대원군이라고 불려졌던 사람의 공간이 자리하고 있다. 덕흥대원군을 시작으로 이곳에서는 전주 이 씨의 덕흥대원군파의 후손들의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덕흥대원군 이초는 연산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중종의 서자였다. 반정으로 오른 왕들은 왕위에 오른 사람의 눈치를 자연스럽게 볼 수밖에 없었다. 중종 역시 왕위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중종에게는 걸출한 여걸 같은 문정왕후가 있었다. 문정왕후는 본관은 파평(坡平). 아버지는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윤지임(尹之任)이며, 명종의 어머니이었다. 

이초(李岧)는 1530년(중종 25년) 3월 5일, 경복궁에서 중종의 서 9남이자 증 의정부 좌의정 안탄대의 딸 창빈 안 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세조대 이후로 아무리 뛰어난 학문과 재능이 있더라도 종친에게는 뜻을 펼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덕흥대원군 역시 그런 분위기 속에  음풍농월이나 하면서 덧없이 세월을 흘려보냈다. 

중종이 승하하고 나서 명종이 즉위했지만 그에게는 후사가 없었다. 짧은 재위 기간을 보내고 명종도 승하하게 되자 셋째 아들 하성군이 보위에 오른다. 그가 임진왜란을 몸소 겪은 선조다. 선조의 아버지였던 덕흥대원군은 조선사 최초의 대원군으로서 사후 임금에 버금가는 예우를 받게 된다. 

그가 생전에 남긴 것이라곤 장인 정세호와의 노비 쟁탈전과 〈해동 서첩〉에 수록된 한시 한 수뿐이라고 한다. 


半世憂愁已作翁. 반평생 우수 속에 이미 늙어버렸는데

聖恩如海泣無窮. 바다 같은 성은은 눈물로도 끝이 없네.

人言可與人情近. 사람들 말처럼 인정에 이끌렸으니

父子君臣義亦同. 부자와 군신도 의리도 마찬가지겠지.

선조는 왕위에 오르기가 힘든 사람이었다. 장남 하원군 이정을 비롯하여 장녀 이명순, 차남 하릉군 이인을 얻었고 1552년(명종 7년) 11월 11일 훗날 선조가 되는 3남 하성군 이균을 얻었는데 서자의 아들이며 장남이 아니었던 선조는 어떤 콤플렉스에 시달렸을까. 

자신의 정통성에 평생 콤플렉스에 시달렸던 선조는 1569년(선조 2년) 11월 1일, 북송 영종의 생부 복왕(濮王)을 추존한 고사를 들어 아버지 덕흥군을 덕흥대원군으로, 어머니 하동군부인은 하동부대부인으로 추존하였다. 그의 콤플렉스는 아들인 광해군으로 이어졌고 그 역시 반정으로 인해 왕위에서 끌어내려 진후 남겨진 세월을 홀로 보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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