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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Apr 05. 2022

백련사

기쁨보다 어려움이 많아야 더 봄스럽다. 

봄의 온기가 꽃에 맺히기 시작할 때

꽃차례에 따라 노랑, 하양, 붉음이 찾아온다.

색으로 본마음의 꽃이 더 아름답게

피어날 때 그대의 눈이 그윽해질까. 


봄이 왔지만 봄이 봄 같지 않게 느껴지는 사람도 있다. 기쁨보다 어려움이 많아 삶이 퍽퍽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이를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고도 한다. 하루하루가 지나고 보면 별 것이 아닌 것 같은데 왜 그때는 그것이 그렇게 크게 느껴졌을까. 남쪽 바다에 임해 있고 골짜기 가득히 송백이 울창하여 동백 또한 곁들여서 수목이 싱싱하게 푸른 모습이 사계절을 통해 한결같은 절경이라고 동국여지승람은 백련사를 표현하기도 했었다. 

강진이라는 넓은 공간에는 아름다운 사찰이 적지가 않다. 그중에 천년고찰 백련사도 포함이 되어 있다.  839년(문성왕 1) 무염(無染)이 창건하였으며, 중요한 수도 도량으로 만덕산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만덕사(萬德寺)라고도 하였다. 

이후로  만덕산에 자리를 잡고 그의 제자 원영(元營)으로 하여금 가람 80칸을 짓게 하였는데 그 뒤 이 절에서는 120년 동안을 이어 고려의 8 국사(國師)를 배출하였다고 한다. 고려 말에는 강진지방이 세 차례의 왜구침입을 받았을 때 이 절도 함께 폐허화되었다.

백련사의 아래에는 동백나무 숲이 군을 이루고 있다. 태종 이방원이 위기에 처했을 때 양녕대군이 원자로 책봉되었지만 이후로 결국 셋째인 충령에게 왕위가 가고 둘째 효령은 불교에 귀의하였다. 조선 세종 때에는 효령대군(孝寧大君)의 보호를 받아 주지 행호(行乎)가 불타버린 백련사의 가람을 복원하였다. 

사람은 항상 어떻게 살지에 대해 스스로가 결정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때론 자신의 마음대로 안될 때도 있다. 

백련사에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시왕전(十王殿)·나한전(羅漢殿)·만경루(萬景樓)·칠성각·요사채 등의 건물이 있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써 각 추녀마다 네 개의 활주(活柱)를 세워 건물을 받치고 있다. 대웅보전이라는 건물의 현판이 보인다.  

고려 때 보조국사의 수선 결사와 함께 원묘국사가 백련결사를 도모한 고찰로 수선 결사는 참선을, 백련결사는 염불을 주창했었다. 대웅보전, 만경루, 명부전 현판은 원교 이광사가 썼다고 한다. 이광사는 신지도로 유배와 16년을 살다 죽었는데 소실된 백련사를 중건한 1762년 무렵 쓴 글씨라고 한다.

멀리 강진만이 내려다보인다. 산속에 들어왔는 이 사찰에서는 많은 이야기가 전해져내려 왔다. 

마른 목을 흘려내려 오는 물로 적셔본다. 

이곳은 스님이 머무는 곳이다. 멀리서 봐서 그런지 몰라도 건물에 비해 스님의 모습이 유달리 작아 보인다. 굳이 원근법을 사용해서 찍은 것도 아닌데 조금은 색다른 느낌이었다.  

백련사라는 사찰을 거닐어보면 알겠지만 석축의 사찰이다. 건물들의 가람배치가 석축 위에 조성이 되어 있는데 느긋한 마음으로 경내를 둘러볼 수 있다. 동생인 이방원의 야심 속에 잠시 임금의 역할을 맡았던 조선 정종대왕의 열째 아들인 덕천군(德泉君) 이후생(李厚生)의 10세손인 이광사가 이곳에 머물렀었다. 

아래로 보니 상록수림이 있고 선의 풍광 배치가 백련사로 왔다는 느낌을 들게 만든다.  세상에는 좋다, 나쁘다를 단적으로 말하기는 쉽지가 않다. 제도나 도덕 같은 세상의 가치들은 절대적으로 옳거나 나쁜 것이 아니라 모두 상대적인 관계에 있으니 단지 각자에게 적합한 것이 있을 뿐이다. 단지 좋은 것을 보고 그대의 눈이 그윽해지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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