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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Apr 11. 2022

마음의 시(詩), 비(Rain)

속삭이듯이 내리는 비속의 영랑생가

마음속에는 누구에게나 시가 있다. 시라고 하는 것은 글과는 조금은 다르다. 글과 시는 같은 언어로 쓰이지만 같은 방식으로 읽히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시와 글은 모두 읽히려고 쓰는 것이다. 마음의 시는 어떤 감성을 전달할 수 있을까. 모란이 피기까지 기다리는 김영랑의 봄은 지금까지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머물렀던 생가에는 그의 시가 여전히 머물러 있었다. 그는 찬란한 슬픔의 봄을 기다리며 모란과 관련된 시를 짓기도 했다. 

남도답사 1번지를 지향하는 강진이라면 가장 먼저 가봐야 할 곳 중에 한 곳이 바로 영랑생가다. 영랑 김윤식 선생은 1903년 1월 16일 이곳에서 김종호의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는데 여러 번 사고 팔리다가 985년 강진군에서 매입하여 관리해 오고 있는데 안채는 일부 변형되었던 것을 1992년에 원형으로 보수하였고, 문간채는 철거되었던 것을 영랑 가족들의 고증을 얻어 1993년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절제된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생각만큼 많지가 않다. 어떤 상황에서도 절제된 언어를 사용하다는 것은 스스로의 자아까지 일상적으로 컨트롤하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기에 자신의 격정 된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언어로 말하기도 한다. 

비가 내리는 날 돌담에 햇볕이 속삭이고 있지는 않았지만 마음 고요히 고운 봄 길 위에 자리한 영랑생가로 들어가 보았다. 이날 내리는 비는 나무와 담으로 흘러내려서 봄 가슴을 살포시 적시고 있었다. 

그의 영랑시집에 실린 시를 보면 섬세하다고 말할 수 있다. 영랑 시인은 촉기라고 시를 특정지었는데 그의 해석에 의하면  "같은 슬픔을 노래하면서도 탁한 데 떨어지지 않고, 싱그러운 음색과 기름지고 생생한 기운"이라고 말했다. 

시인들은 무언가를 자신만의 언어로 노래하고 드러낸다. 김영랑이 살았을 때는 일제강점기라서 그런지 애절하면서도 슬픈 마음을 노래한 시들이 많았다. 그는 형식에 따라 시를 쓰기도 했지만 후기에는 내용을 더 많이 담았다. 

김영랑 시인의 가족이 머물렀던 곳에는 전에 사용했던 가재도구들이나 후에 채워 넣은 가구들이 남아 있다. 자밋 툇마루에 앉아서 그 모습을 살펴본다. 

막 쏟아지는 소나기는 다른 생각을 씻어가지만 조금씩 내리는 가랑비는 마음을 적셔준다. 시원한 느낌의 소나기와 채우는 가랑비중 어떤 것이 좋은지는 그때마다 다르다. 영랑생가 같은 초가집은 손이 많이 간다. 

비가 내리는 곳에서 물끄러미 영랑생가의 건물들을 내려다본다. 초가지붕에서 내리는 빗물이 땅으로 떨어져셔 조그마하게 구멍을 만들고 있다. 

문득 아래를 내려다보니 고무신이 준비되어 있었다. 영랑 시인이 주로 신었던 신발이 고무신이었을까. 그의 시를 보면 옥천을 대표하는 시인이며 동인이었던 정지용이 있다. 영랑은 정지용과 함께 순수시를 썼던 사람이다. 때론 좀 더 오래 숙성시키지 못했던 것에 생각이 머무를 때가 있다. 그렇기에 사람이지 않을까. 부족한 것이 있기에 여전히 서정의 언어를 고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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