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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Apr 17. 2022

파리 평화회의

그들은 우리에게 관심이 없었다. 

사람들은 세상을 무언가 정의롭고 정당하지 않은 것에 분노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그런 건 없다. 선하고 공정하고 중립적인 국가가 있다고 해서 침략을 하지 않을까. 주권국가인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게 침공을 당했지만 미국이나 나토에서 경제봉쇄와 더불어 군수품 지원 외에 적극적으로 하는 것은 사실 없다. 오히려 이 상황이 미국에게는 이득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 G2 중국을 상대해야 되는 시점에 러시아까지 커진다면 고달픈 것이 미국이다. 우크라이나가 다행히도 러시아의 힘을 빼놓고 있다. 정당하게(?) 가해진 경제제재는 앞으로 러시아를 오랫동안 힘들게 만들 것이다. 미국은 우크라이나 국민이 얼마나 희생되든 큰 비중을 두고 있지 않을지 모른다. 

조선 혹은 대한제국이 국제회의에 참여할 수 있었을까. 게다가 일제강점기로 들어간 이후에 조선은 별다른 의미를 가지지 않은 동양 변방의 식민지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큰 의미를 부여했고 독립을 원했다. 일제강점기 초반에 유럽은 1차 세계대전의 화마에 휩싸여 있었다. 그리고 독일이 지고 나서 파리강화회의가 열렸다. 

1919년에 삼일 운동이 일어났을 때 그는 파리평화회의에 보내는 독립청원서를 작성·서명하는데 참여했던 사람 중에 김복한이라는 독립운동가가 있다. 이곳은 바로 을미년 의병대장이었던 김복한 선생 유적지인 추양사로 도지정 문화재 자료 제169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1892년에 별시 문과에 급제해서 교리, 양사, 사서, 통정, 대사성, 형조참의를 거쳐 2년 만에 승지에까지 제수된 김복한은 일본의 영향이 미친 갑오개혁이 시작되자 조정에서 나와 충남 홍주로 내려왔다가 을미 홍주의병과 관련되어 체포되었다. 

파리강화회의는 독일등의 패망국에 대해 어떻게 할지를 결정하는 자리였다. 그 자리에 보낸 독립청원서는 그 어떤 영향을 미칠 수가 없었다. 주요 의제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전쟁책임 판정과 전쟁 재발 방지 보장, 배상금, 국제노동입법, 국제적인 항구·수로·철도, 재정문제, 영속적인 성질의 경제문제, 항공 및 육·해군 문제 등이었다. 

추양사가 건립된 시기는 1975년으로 김복한 선생을 존경하던 사람들이 발의하여 당시 홍성군수 조영호가 300만 원을 들여 추양사를 준공했고 이어 부임한 이관현 홍성군수가 군비 500만 원을 투입해 저와사업에 착수하여 논과 밭, 산을 매수해 사역을 확대했다. 

넓게 봐서 국가 간의 분쟁이나 지역 간이나 더 좁게 봐서 조직으로 본다면 모든 것이 힘의 논리다. 힘이 없으면 발언권도 없다고 볼 수 있다. 검사들이 지금 난리 치는 것이 무엇인가. 그들에게 힘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전혀 관심이 없다. 국민이 피해를 입은들 그들은 명성을 높여줄 수 있는 사건이나 돈을 많이 벌어줄 수 있는 사건 외에는 관심이 없다. 그래서 수사권에 목을 매는 것이다. 이은해 사건도 전혀 관심이 없는 사건이었는데 그알에서 이슈화시키니 관심이 생긴 것이다. 

글쎄 정의라는 것이 어느 잣대에 해당되는지는 모르겠지만 파리평화회의에 보내는 독립청원서를 작성·서명했던 서명자 137명이 모두 일경에 체포되고 그는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가 순국했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이완용 등 을사오적의 처단을 상소하고 의병을 일으켰다가 체포되었던 김복한 선생은 모진 고문으로 불구가 되었는데 사후 1963년에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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