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읍일교(一邑一校)의 체제 속의 서천향교
삶의 속성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일명 도라는 것은 종교의 신도 아니고 물리학에서 말하는 입자도 아니다. 실제로는 어떠한 모습도 없지만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형태와 이름을 가지게 된다. 본질적인 속성을 누구나 말할 수 없기에 쉽게 말하기도 한다. 얼마 전 계간지의 편집회의에서 어떤 사람의 인터뷰에서 유교적이라는 것을 부정적으로 기술하였기에 지적을 하였다. 제대로 공부를 안 한 사람이나 한 분야만 열심히 한 사람들이 편협되는 경우가 많다.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고 장자는 말하기도 했다. 언어는 한계가 있다. 한 문장을 이야기해도 받아들이는 사람의 수준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도는 들어서 얻을 수 없으니, 들어서 얻는 거은 도가 아니며 도는 눈으로 볼 수 없으니 보아서 얻는 것은 도가 아니라고 한다. 문득 서천을 찾아 서천향교의 홍살문을 바라본다.
서천향교와 같이 현재 중고등학교 수준의 교육공간이 완전히 자리하게 된 것은 세종대였다. 하나의 읍에 하나의 향교가 자리하게 한 것이다. 조정에서는 향교 교수직에 과거 급제자를 임명하고자 하였지만 과거에 급제한 선비들은 이른바 출세가 용이한 중앙부서에 청요직(淸要職)만 선호하고, 지방의 한미한 향교 교수직은 기피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 시대에도 국토의 균형발전의 중심에는 교육이 있다. 어느 곳에서 공부를 해도 자신의 자아실현을 할 수 있게 해 준다면 서울과 수도권으로 집중되는 문제는 해결할 수가 있다. 능력 있는 사람들이 가르치게 되면 학생들의 수준도 높아진다. 출세하려는 사람들이 중앙부서만 선호하며 향교 교수의 자격도 차츰 낮아져서 결국에는 자격 없는 인물들이 너도나도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지금 검사들이 지방의 한직으로 갔다고 해서 핍박받았다고 헛소리하는 것과 같다.
향교의 교수 중에 유학 경전조차 제대로 읽지 못하는 인물들이 다수 등장하게 되면서 선비들이 항교의 교육을 외면하였지만 향교의 사회적 기능이나 일부 사람들에게 교육기회를 주고 의례적 기능 역시 꾸준히 유지되었다.
향교에 올라서서 서천을 내려다보았다. 무언가를 표현할 때 있어서 명확하게 표현할 수도 있지만 필자는 여러 가지 의미를 담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 문장의 언어로 담아낼 수 없는 것이 더 많기 때문이다. 그것을 우언이라고 하는데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이야기에 담아서 말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언어가 가지는 국한성을 보완해준다. 그렇지만 많은 글과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깨닫지 못하기도 한다.
서천향교는 안쪽으로 들어오면 대성전을 제외하고 살펴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농상(農桑)은 왕정의 근본이요, 학교는 풍화의 근원이다, 즉위 이래 여러 번의 교서를 내려 농상을 권장하고 학교를 일으키는 뜻을 보였다 “ - 태조실록
향교가 교생을 끌어들일 수 있는 요인에는 군역 면제(軍役免除)가 있었다. 양반들은 애초에 군역 자체가 없기에 뜻있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열심히 노력하는 선비들이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향교의 교생에게는 군역 면제(軍役免除)라는 커다란 특권이 주어졌기 때문에 중인이나 평민들은 군역 면제를 통한 신분 상승을 목적으로 향교 교생이 되고자 했던 것도 사실이다.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적용되고 공정하게 생각되려면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일관성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할지라도 소수의 사람들이 반대한다면 일관적이지 않은 것이다.
세종 17년(1488)에 전국에 일읍일교(一邑一校)의 체제를 갖추어 8개도에 329개소의 향교가 설립되어 거의 모든 군·현에 향교가 분포되고 이후 발전을 거듭하여 1918년에는 335개소의 향교가 기록되고 있다. 향교는 제향 공간과 강학 공간이 하나의 축으로 형성되어 있고, 각 공간마다 대지고저차(垈地高低差)를 두어 공간의 확실한 구분과 독립성을 준 것이 일반적인 형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