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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Apr 21. 2022

용문비갑

썩어가는 사람이나 조직은 자신의 냄새를 모른다. 

정의와 공정이 점점 희미해지는 사회일수록 정의와 공정을 외치는 정치인이 나온다. 자신의 탐욕은 당연한 능력에 대한 대가로 포장되고 공정하지 않게 열어준 자식의 길은 부모의 사랑으로 왜곡된다. 썩어가는 사람이나 조직은 자신이 풍기는 냄새를 맡을 수 없다. 썩은 냄새를 항상 맡고 살아가기에 그 냄새가 어떻게 풍기는지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봐야 하지만 그런 정치인은 많지가 않다. 


신용문객잔의 추억을 생각하며 영화를 보았으나 중국판 인디아나 존스의 흔적만을 가슴에 남기고 나온 느낌이 들지만 나쁘지 않았던 영화가 용문비갑이다. 화려한 캐스팅과 나름 큰 규모의 스케일을 가지고 그렸으나 이도 저도 아닌 영화가 되어버렸지만 지금은 이 정도의 영화도 중국에 기대하기가 어렵다. 영화 용문비갑은 중국 역사 속의 부패를 다루고 있다. 동창과 서창이라는 나름 상호 견제를 하면서 조정을 제대로 운영하기를 바랐지만 청렴한 관리를 죽이고 오히려 부패한 관리는 살려놓는 부패한 기관으로 전락하게 된다. 

제3의 대안이 없이 큰 정치세력이 두 개뿐이라면 결국 썩어가게 된다. 번갈아가면서 탐욕을 채우면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보통 부패는 권력과 밀접하게 연관이 있다. 권력관계가 존재하는 곳에는 비전형적 부패의 가능성이 늘 존재했다. 권력과 이익의 교환은 누구나 다 아는 이치이다. 보통 '감시 없는 권력이야말로 부패의 근원'이라는 말이 있지만 과연 그럴까? 그런 논리라면 감시만 잘한다면 부패는 사라져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돈이 있는 곳에 부패의 씨앗은 자라게 된다. 

부패를 잡으려는 이연걸 역의 주유안이나 과거 객잔의 주인이였던 주신, 서창의 도독 진곤, 첩자 장형여등까지 캐릭터의 구성으로 볼 때는 괜찮은 배합이었다. 그러나 괜찮다고 느껴지는 것은 영화 초반뿐이었고 갑자기 이상한 방향으로 극 전개가 시작되면서 영화의 방향을 종잡을 수가 없게 되어버린다. 영화는 관행적 부패를 일삼던 동창을 일벌백계 하는 것 같으면서 서창이 갑자기 등장해서 둘 사이의 기관 사이의 알력이 생기는 것 같더니 뜬금없이 조정의 반역자들을 쫒았다니는 느낌이 든다. 중국의 본질적인 문제는 짚지 못하면서 캐릭터만을 살리려니 한계가 있었다. 


부패라는 습관이 정착되는 데에는 세 가지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

첫 번째, 국가 전체에 권력 지상주의가 만연해 있어야 한다.

두 번째, 권력 매수의 풍토가 국민들의 공감을 얻어야 한다.

세 번째, 전형적 부패로 이어지지 않는 권력 매수와 기회의 독점을 모두가 일상 행위로 여겨야 한다.  

영화는 전반적으로 CG를 제외하고 액션은 괜찮은 편이었다. 스토리는 없고 액션만 남아있다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 물론 끝부분에 나름의 반전을 준비해놓기는 했지만 그냥 인물적인 반전만 있었다. 홍콩영화의 르네상스를 꿈꾸면서 영화를 만든 것 같으나 과거의 영광은 그냥 과거일 뿐이다. 물론 이런 중국식 사극을 보고 싶었던 관객이나 이연걸의 무술을 다시 보고 싶었던 사람이라면 이 영화를 추천할만하다. 나름 화려하면서 손에 땀을 주는 무협 액션이 있었다는 것이 그나마 만족할만한 일이었던 것 같다. 


언론에서 포장하는 대로 혹은 정치인이 떠드는 대로 믿지 않고 본질을 볼 수 있다면 더 이상 공정과 정의를 떠드는 사람이 등장하지 않을 것이다. 국민을 위하지 않기에 국민을 내세우는 것이다. 그래야 부패의 동력원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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