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 여하정에서 루소처럼 거닐기
루소는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수십 년 전에, 원자력 발전소가 건설되기 전 수 세기 전에 환경 문제를 예측했던 사람이다. 그는 걷기를 즐겨하면서 살았다. 루소의 자연주의는 처방이라던가 적극적인 대응이 아니라 사회에 문명이라는 물감으로 색칠한 것을 모두 벗겨내고 진정한 자신이 어떤 존재일까를 생각했다. 걷는 것은 리듬을 찾는 일이기도 하다.
새들이 노래하는 것은 같은 느낌을 받으며 홍성군청의 뒤에 자리한 여하정으로 걷는다. 발밑에 폭신한 잔디가 밟히는 느낌이 만족스럽다. 어느새 미묘하지만 확실한 변화를 느낄 수 있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사람들은 비슷하다고 생각하지만 한 번의 지저귐으로 많은 정보를 전달한다고 한다. 예를 들어 매 같은 포식자가 오는 것을 크기, 거리, 형태, 위협 등을 모두 담을 수 있다고 한다. 우리는 그 의미를 전혀 다르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홍성 여하정에는 오래된 고목이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안회당 뒤뜰과 연접하여 소당위에 있는 여하정은 고종 33년(1896)에 이승우 목사가 신축한 수상정으로 목조와 즙의 육각형 정자다.
홍주읍성에 올라가서 보면 아래로 모든 것이 내려다보인다. 이 길을 걸어서 돌아보면 홍성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홍성 견문록을 써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우선 이곳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
직사각형의 연못에 섬처럼 만들어져 있고 여하장이 자리하고 있다. 나무가 건물보다 훨씬 큰 규모를 자랑한다. 배려에서 나온 행동 하나하나는 느티나무 씨앗에 물을 주는 것과 같다. 그 나무의 키가 이렇게 자랄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시작이 있으면 된다. 시작이 있으면 뭐라도 된다. 온도가 많이 올라서 그런지 그늘이 조금씩 더 반가워지고 있다. 아름드리나무들은 정자와 궁합이 좋다. 끊임없이 물소리가 들리기에 아래를 바라보니 물을 계속 퍼올리고 있었다.
정자에 앉아서 사람들이 말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사람들은 상대를 쉽게 파악하기 위해서 혈액형이나 별자리를 동원한다. 한 사람의 정체성은 그렇게 간단하게 규정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무언가 규정하고 싶어 하는 것이 사람이다. 그렇게 얕은 생각으로 상대를 평가하는데 가장 좋은 것이 혈액형과 같은 것이다. 너무 광범위하고 웬만하면 다 거기에 걸리기 때문이다.
안회당은 홍주목의 동헌으로, 오량으로 된 22칸의 목조와가이며, 고종 7년(1870) 4월에 상량하여 전 주민의 정성과 정교한 기술로 완성한 관서로서 사적 제231호로 지정되어 있다. 안회당에는 학생들이 와서 흘러간 역사에 대해서 듣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