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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May 13. 2022

죽은 시인의 사회

시작부터 잘못되면 사람은 영원히 갇힌다. 

사회 시스템이란 과연 무엇인가. 사회의 근간을 지탱하는 것은 기회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기회는 공정한 적이 있었을까.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자체가 공정하지 않다는 의미다. 왜 아무 물에서나 용이 날 수가 없는 것일까. 아주 좋은 기회가 100개가 있다면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은 몇 개만 두고 머리 터지게 노력을 해야 할까. 기득권은 왜 수월하게 그 기회를 가져갈 수가 있게 놔두는 것일까. 


영화 속 이야기이지만 죽은 시인의 사회는 그런 사화에 대한 경종을 울리고 있지만 그냥 그렇게 끝이 난 영화다. 이 영화가 개봉했을 때 한국은 니 아빠 뭐하시노~를 왜 치던 학교 분위기 속에 살았었다. 누군가를 매를 통해 교화시킨다던가 학업성적을 올릴 수 있다고 생각했던 철없는 어른들이 세상에 넘쳐나던 시기였다. 그들이 말하는 사랑은 자신의 무지를 외면하는 그런 사랑이었다. 어떻게 보면 아이를 향한 폭력은 자신의 무지를 감추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영화는 명문인 웰튼 아카데미의 이야기이다. 집안도 넉넉하고 공부도 잘하는 학생들이 모인 학교다. 공부가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살아가는 참 재미없는 학교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실제 이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의 상당수는 모두 명문고 출신들이기도 하다. 필자의 글에서 자주 인용하기도 했던 라틴어 카르페디엠(오늘을 즐겨라)을 실천하려는 키팅 선생님이라는 괴짜 같은 선생과 학생들의 교감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삶의 가치는 공부로 증명되지는 않는다. 공부는 하나의 수단일 뿐 누군가를 평가하는 유일한 잣대가 되어서는 안 되지만 사회는 잣대로 사용한다. 그러면 편해지기 때문이다.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나오는 6명의 학생들은 진정한 삶의 가치를 위해 투쟁한다. 사회가 짜 놓은 판에서 만들어진 뻔히 보이는 길을 잘 잘어간다면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지만 이들을 그 대신 없는 길을 찾으려고 한다. 

필자는 지금도 예술적인 색채를 더하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다. 멋모르고 시작한 가야금이 점점 어렵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물론 연습도 부족하지만 매주 '다시, 다시, 다시....'라는 말에 무언가의 압박감을 느끼지만 필요하다는 것을 생각한다. 예술은 삭막한 세상에서 완충역할을 해준다. 간과하고 살았던 사람들의 삶과 사람이 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부족한 부분을 보충해준다. 

21세기 들어 공정과 상식이 화두가 되고 있는 것은 그만큼 기회가 공평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끊임없이 교육시스템을 바꾸지만 여전히 제대로 고쳐지고 있지 않은 것은 그걸 설계하는 사람들이 그 가 기치 기준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교육의 문제를 본질적으로 보기 위해서는 그 과정을 통한 종착점을 보면 된다. 바로 사회다. 공정하지 못하게 출발해서 공정한 것 같지만 공정하지 않은 시험이나 이력을 통해 얻은 타이틀이 언제까지 불공평하게 평가의 잣대로 활용되어야 하는가.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는 지금도 유효한 사회의 잣대 기준에서 벗어나지 말라는 교육에 반기를 든 괴짜 선생과 이에 동조한 학생들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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