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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May 17. 2022

자유의 착각

모든 이에게 자유는 공정하지 않다. 

자유와 공정의 이슈가 2022년을 달구고 있다. 앞으로도 계속 등장할 수밖에 없는 이슈일 것이다. 누군가가 말하는 자유는 자신이 누리는 자유와 다르다. 분수에 맞는 자유를 말하고 있다. 그 분수란 무엇인가. 할 수 있는 것만 해!라는 의미다. 이 세상은 공정도 없고 자유도 지극히 제한적으로만 있을 뿐이다. 교육받을 자유와 원하는 직업을 얻을 수 있는 자유가 있을까. 예를 들어 장관 후보자들의 자녀들에게 쏟아붓는 교육비는 부의 대물림이다. 교육이라는 것으로만 포장했을 뿐 현금으로 증여하면 5,000만 원 이상에서 과세가 되지만 교육비는 1년에 1억을 지원해줘도 과세가 없다. 


모든 부모가 자식에게 1년에 1억씩 들여가면서 가르칠 수 없다. 자녀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그럴 수 있는 자유는 없는 셈이다. 교육에 쏟아붓는 돈은 비교적 안전하게 부의 대물림을 할 수 있는 수단이기도 하다. 외국에서 배운 한국인들이 외국에서 안정적으로 직장을 다니는 경우보다 국내로 들어와서 그 타이틀로 돈 벌어먹는 비율이 훨씬 높다. 


어떻게 보면 진짜 희한한 사회다. 한국인들에게는 헌법에서 규정한 보편적으로 적용되어야 하는 국방의 의무가 있다. 대한민국의 남자라면 누구나 져야 할 의무다. 그런데 BTS같이 잘 알려진 그룹이라고 해서 국방의 짐을 덜어주자고 정치인들이 떠들고 있다. 물론 정치인들의 자식들은 국방의 짐을 지지 않을 자유가 좀 더 많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자유는 일반인들의 자유와 격이 다르다. 아니 지향하는 바도 다를지 모른다. 


자 생각해보자. 그 시장 가치가 그들의 사회 기여도를 나타내는 진실한 척도라고 볼 까닭이 있을까. 한국사회는 경제적인 효과에 왜 이리 목을 맬까. 연예인들을 옹호하는 자칭 예능 평론가들의 머릿속에는 쓰레기가 가득 차 있는 것 일가. 차라리 헌법에서 선택적 국방의 의무라고 명시했다면 조금이라도 납득이 될 듯하다. 완전경쟁 시장에서는 각자가 자기 노동의 한계 생산물에 따라 선택적 자유를 누리게 된다. 


이상하지 않은가. 왜 평등주의적 자유주의는 능력주의적 오만을 부추기고 있는 것일까. 자유를 누릴 권리를 인정하는 것은 일정한 경쟁 규칙을 준수했을 때 부여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어떻게 규칙을 정했는지는 우리는 일단 알 수가 없다. 한국사회에서 볼 수 있는 소득과 권력의 불평등은 기회를 공정하게 평준화한 사회에서는 대체로 있을 수가 없다. 


누군가에게 자유는 자신의 분수를 넘어서 혹은 가질 자격은 셀프 인증한 채 한강처럼 넓은 확장성이 있고 대다수의 국민에게는 실개천같이 졸졸졸 흐르는 물에 만족해야 하는 좁게 해석한 자유에 불과하다. 고위직 장관이나 각종 꿀빨 수 있는 자리들을 가고 싶어 할 자유는 있지만 선택지에 조차 이름이 없다면 그것이 자유일까. 국민들이 언론 등에 휘둘리고 있는 사이에 부자와 권력자들은 참을 수 없을 만큼 거만해졌으며, 자유주의자들이 그들의 성공은 그들 자신의 능력 덕분이라고 믿는다. 


사람들이 끝도 없이 학교, 대학, 직장에 의해 선별되고, 구분되고, 심지어 소고기처럼 등급이 매겨지는 과정 속에서 신자유주의적 능력주의는 대다수를 패배자로 만들어버린다. 아무리 자유를 외쳐도 그 자유를 보는 관점의 차이는 안드로메다만큼 간극이 크다. 아울러 모든 이에게 자유는 공정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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