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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May 18. 2022

무신정권

폐사지가 된 강진의 월남사지에서

제어받지 않는 모든 정권은 반드시 부패한다. 제어받지 않는 인간의 탐욕은 결국 스스로를 파멸로 이끈다. 역사에서 보면 그런 사례는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찾아볼 수 있다. 고려시대에 백성들이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바로 무신정권 때였다. 무신정권은 1백 년간 존속되었는데 고려 전기 사회가 문벌 귀족들에 의한 문신 중심의 정치가 행해져 상대적으로 무신들에 대한 차별에 정권이 바뀐 것이었다.

탁 트인 곳이어서 마음까지 편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월남사지는 무신정권 때 적지 않은 지원을 받았다.

무신정권대 문장가인 이규보가 진각대사비가 비문을 지었는데 진각국사 제자 118명의 이름은 별도로 최자가 지은 것이라고 한다. 음기에 따르면 진각대사비 비는 고종 37년(1250)에 최 씨 무신정권의 제2대 집정인 최우(崔瑀, 崔怡와 같은 사람)와 그의 아들 최항(崔伉)의 각별한 관심에 따라 이곳 월남사에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전에 왔을 때 월남사지는 문화 재발굴 중이었는데 지금은 모든 것이 정돈되어 편안하게 느껴지는 공간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무신정권 당시 고려의 토지제도는 문신 귀족의 발호 시대부터 문란해지기 시작했지만, 무신정권 시대에 들어 더욱 심하였다. 이때 농민의 생활은 어려워져 빈곤과 고통 속에서 신음해, 사회는 더욱 혼란해졌다.

월남사지는 월출산을 뒷 배경으로 두고 가람이 배치가 되었는데 비교적 완만한 경사지에 4개의 단을 만들고 각각의 단에 평평한 대지를 조성하여 건물들을 배치한 것으로 보고 있다.  

전남에서 규모가 상당하였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월남사지의 규모는 외곽 담장의 흔적으로 추정해볼 때  동서방향인 전면의 길이가 175m, 남북방향인 측면의 길이가 185m로서 총면적은 1만여 평에 달했다고 한다.  

진각국사가 세우고 무인정권의 각별한 관심 속에 사세를 확장해나가던 월남사가 언제 폐사가 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지만 월남사지 중앙에 있었던 월남사지 3층 석탑만이 사찰이 있었음을 알리고 있다.

월남사지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진각국사비가 있다. 진각국사가  혜심(慧諶, 1178~1234)이 창건한 사찰 월남사는 월출산을 배경으로 월남마을 중앙에 자리하고 있는데 호남 5대 명산이라는 월출산의 정기를 받는 곳이다. 월출산은 일출과 서해를 물들이는 일몰 광경은 호남 제일의 경관으로 손꼽히고 있다.

월남사지 진각국사비는 전체 높이 3.58m, 직사각형 대석 높이 2.6m, 너비 2.3m의 크기로 세워졌으며 사찰을 창건한 진각국사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1963년 보물로 지정된 후 1973년 비의 내용을 파악 한 뒤에 진각국사비라고 정정했다.  거북받침돌 위에 비 몸을 올린 형태이며 머릿돌은 없다. 거북은 긴 목을 빼고 입에 여의주를 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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