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사지 천년역사관속의 최치원
그 끝이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누구에나 주어진 삶의 시간이 있다. 길게는 백 년을 넘을 수가 있고 짧게는 수십 년이 될 수 있다. 지금 자신이 어느 지점에 있는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자신의 남은 삶이 길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느 지점에서는 안타까워하면서도 오늘은 쉽게 생각한다. 오늘, 일주일, 한 달쯤은 아무렇지 않은가. 1년쯤 지나 나이를 한 살이 더해질 때 나이가 듬에만 탄식을 하지 주어진 삶의 가치를 여전히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보령의 성주사지는 가장 먼저 최치원의 흔적을 찾아서 간 곳이다. 고운 최치원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가장 충실하게 살았던 사람이기도 하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욕심이 필요하다. 이 욕심은 물욕이나 무언가를 많이 가져야 되겠다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하고 싶어 하고 무언가가 되고 싶어 하는 욕심이다. 이런 욕심이 있는 사람은 늙지 않고 멈추지 않고 자신도 몰랐던 스스로를 만나는 것이다.
성주사지 천년 역사관이 조성되기 시작한 지 시간이 오래 지났다. 그리고 드디어 천년 역사관이 개관을 하였다. 성주사지는 사라졌지만 사라진 것은 건물과 옛 모습이며 기록만은 이곳에 남아 있다. 보령 성주사지의 색깔이 극명하게 두드러질 때는 봄과 가을로 봄에 완연한 녹색의 싱그러움이 있다면 가을에는 총천연색의 화려한 끝맺음이 좋다.
입구에 들어오자마자 만나는 것은 바로 글이다. 고운 최치원의 화려한 문장이 5120자로 그려졌으며 최인연이 해서체로 써놓은 것이다. 오랜 시간 동안 세월을 이겨가며 버틴 덕분에 우리는 최치원의 문장을 볼 수가 있다. 비문의 내용에 의하면 신라 헌덕왕 때 중국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낭혜화상 무염이 성주사에 머물다가 입적한 지 2년 뒤에 부도를 세웠다고 한다.
성주사지에 자리했을 사찰을 처음 창건한 법왕은 백제 제29대 왕이다. 문화재청은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6호 ‘보령 성주사지 동 삼층석탑’을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제2021호로 지정했는데 이로 보령 성주사지(사적 제307호)에는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국보 제8호)등 1기의 탑비와 4기의 삼층석탑이 국보와 보물로 지정하였다.
지금은 사라진 성주사를 복원해둔 모형을 볼 수가 있다. 언젠가는 존재했을 것들이 있지만 지금은 사라진다. 오직 그때만 그 순간이 존재했을 뿐이다. 우리에게 있는 감정 지능은 우리의 생태적. 사회적 보금자리 안의 맥락에서 발생하는데 우리의 감각들 덕분에 우리는 스스로 존재하지 않는 실재와 접촉할 수 있다.
이곳의 중심 공간은 바로 무설토의 세계가 아닐까. 디지털 기술을 이용하여 그 시간으로 돌아보는 영상을 만나볼 수 있다. 사람의 뇌는 이렇게 다양한 공간에서 무작위로 있는 것 같은 점들이 선을 이루면서 이어진다.
저 끝에서 선이 이어지듯이 빛이 이어지고 있다. 가까운 일상에서 저 선처럼 유추를 끌어낼 수 있으면 그것이 사람다움으로 나아가는 방향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다움이라는 것은 바로 주어진 삶의 가치를 깨닫는 것이기도 하다.
통일신라 이후에 신라에서는 권력의 주류에서 멀어진 왕족과 귀족들은 신분상승의 제한을 피해 중국으로 유학을 시도하였다고 한다. 당으로 건너간 이들 중 승려들은 당시 중국에서 새로이 떠오르던 선종불교를 신라에 보급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당 유학승들은 왕실과 중앙귀족, 지방호족들의 지원에 힘입어 각 지방에 산문을 건립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9개의 산문을 일컬어 구산선문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