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국부론 vs 신곡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

자신이 살아생전에 할 수 있는 것은 얼마나 될까. 사람마다 다양한 재능을 가지고 있지만 그 재능이 발현되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을 동반한다. 특히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타기 위해서는 그들의 책을 읽지 않고서는 가능하지 않다. 지금까지 많은 위대한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남겼다. 대부분의 학생이나 직장인, 자영업자들도 자신이 가장 잘하는 분야는 있어야 한다. 대학에서는 전공이기도 한데 자신이 업으로 삼은 전공은 당연히 다른 사람보다 잘해야 한다. 그것은 그다지 자랑거리가 될 수가 없다. 전공 외에 무얼 더 잘할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

MG0A2633_resize.JPG

이탈리아로 쓰인 단테의 신곡은 집에 두 권이 있다. 한 권은 원래 단테 알리기에리가 지은 신곡과 다른 한 권은 소설의 형태로 쓰인 신곡이다. 시대를 달리 한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과 단테의 신곡을 비교한 것은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말하기 위함이다. 대학 1학년 때 전공도 아니어서 누군가 읽으라고 한 적도 없지만 경제학의 기본인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과 예술인들의 책인 단테의 신곡은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있었다.

MG0A2634_resize.JPG

전공의 특성상 기초공학, 수학, 도면 등에는 익숙했지만 국부론과 신곡은 잘 읽히지 않는 재미없는 책이었다. 읽어야 할 이유도 딱히 없었다. 그런데 차별화되기 위해서는 읽어야 한다고 생각을 했었다. 싫어하는 것을 할 수 있어야 다른 사람보다 나아갈 수 있다는 주의였다. 단테의 신곡이 단계별 지옥을 통해 사람이 가진 생각을 통찰하는 책이라면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가 어떤 형태로 진화하는지 보여주는 책이었다.

MG0A2635_resize.JPG

신곡은 삶에 대한 성찰을 할 수 있다면 국부론은 경제가 발전해가는 과정과 근대역사를 알 수 있게 해 준다. 21세기의 경제는 애덤 스미스가 생각한 대로 흘러가지는 않았지만 오랜 시간 그의 경제적인 관점은 적당하게 맞아 들어갔다.

MG0A2636_resize.JPG

단테의 신곡을 그린 대화가는 여러 명이 있지만 그의 지옥을 적당하게 잘 표현한 것은 구스타프 도레만 한 사람도 없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온갖 욕망과 욕심, 잘못된 판단에 의해 자신의 삶을 굴곡시킨다. 우리는 아무도 모른다. 그런 죄를 지어서 지옥에 가면 단테의 신곡 같은 벌을 받게 될지 말이다.

MG0A2638_resize.JPG

옛날의 책들은 정말 깨알같이 쓰였다. 종이값이 비싸서 그런지 아니면 책은 이렇게 읽어야 제맛이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딱 봐도 읽기가 싫어질 수 있다. 그 많은 정보를 꼭 이렇게 담아야 했을까.

MG0A2639_resize.JPG

그가 만든 경제학은 그가 말했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충분히 왜곡되어가고 있다. 사람은 자신의 욕심으로 결국 누군가를 이롭게 한다고 생각했던 애덤 스미스의 말은 적어도 실물이 기반이 되었을 때였다. 지금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적어도 20세기까지 우리가 저녁식사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이익을 추구하는 그들의 생각 덕분이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아무것도 주지 않을 탐욕이 사회를 망치고 있는지 모른다.

MG0A2640_resize.JPG

탁월해지려는 노력은 자신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 이롭게 만들려는 것이다. 그렇지만 돈만을 쫒는 사람들의 노력은 다른 사람을 해롭게 만들어 자신을 이롭게 만드는데 목적이 있다. 신곡에 등장하는 지옥의 입구에 쓰여 있는 "여기에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는 누구에게 해당이 될까.

keyword
작가의 이전글매향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