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의현, 충청남도, 충청북도로 바뀐 양지리
대전과 청주의 접점 지역에는 금강은 지역명부터 행정구역의 변화에 많은 역할을 했었다. 지금은 명확하게 구분이 되어 있지만 신탄진과 건너편의 현도면은 금강의 곡류부에 서로 접하고 있어서 행정구역은 계속 변해왔다. 양지리라는 지역은 청주에서도 끝자락에 자리한 곳이지만 양지바른 곳이라고 불릴 만큼 농사를 짓기에 좋은 지역이었다. 지금도 양지리의 옛 이름이었던 보래(南村) 마을의 유래처럼 보성 오 씨들이 모여 살고 있다.
대전의 신탄진으로 넘어가기 전에 태극기가 그려진 것이 궁금해서 잠시 멈추어보았다. 양지리 태극기 마을은 2007년부터 광복절 이후 나라 사랑 실천을 위해 주민들이 태극기 걸기 운동을 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양지리는 나루터가 있었는데 건너편의 새여울이라는 이름의 신탄진과 통행을 위해 陽地와 대전광역시 신탄진을 왕래하는 나루터였던 양지 나루터가 있었다.
이곳을 둘러보기 위해서는 양지리에서 내려서 건너오면 된다. 아늑한 느낌을 받는 지형에 보성 오 씨 가문의 아들 5형제와 살던 과부가 생업을 잇기 위해 보리를 심었다고 한다. 그 보리가 잘 자라서 삶이 풍족해졌는데 그래서 보리마을, 즉 보래라고 불렸다고 했다. 양지1리와 양지2리가 양지리에 포함되어 있다. 아랫말, 웃말, 음지편등이 옛 마을 이름이지만 총인구수는 200명이 안된다.
금강변의 생태 누리길이 있는데 생태 누리길의 주변으로 금강철교, 금강 인도교, 금강 고속도로 철교가 청주와 대전을 이어주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안쪽으로 들어가서 마을을 돌아본다. 보래마을은 1597년(선조 30년) 충청도 문의현 일도면 신탄리라고 불려졌던 곳이다. 일제강점기인 1910년 신탄진이 충청남도에 편입되면서 지명은 양지리로 바뀌었다. 충청남도에 속해 있던 신탄진은 대전이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대전으로 편입이 된다.
마을에서 앞쪽으로 가면 옛날에 장마로 토사가 쌓여 새로 생긴 여울이 있는데 조선시대에 양지리에 살던 吳俊立이 친환으로 잉어를 구하던 중 이곳에서 잉어가 튀어나와 늙은 아버지를 봉양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보래마을이라고 불렸던 양지리라는 마을에는 다양한 이름들이 있다. 마을이 크지는 않지만 다름고개, 박사당골, 보래터널, 행개, 증상이, 함진로롱이, 허수고개, 애기난 바위등의 이름이 전해지고 있다.
마을을 한바퀴 돌아서 나오는 길에 천하 대장승, 지하여장군의 석장승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본다.
전형적인 농촌마을로 지금도 보리를 재배하고 있는데 지금은 대부분 벼가 커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시간이 있는 분들이라면 금강변 생태누리길을 걸어보는 것도 좋다. 건너편에는 수시로 대청호로 오가는 자전거를 탄 사람들을 볼 수 있지만 이곳은 상대적으로 오가는 사람들이 적다.
모내기를 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서 벼가 쑥쑥 자라나고 있다. 조금만 있으면 벼가 익어서 알알이 달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듯하다. 이제 대서가 코앞에 와 있다. 이 무렵은 몹시 덥고 장마로 인해 녹음이 우거지며 몸이 힘들어질 때다. 그렇지만 과일은 이때가 가장 맛이 나며 1년 24개의 절기 중 딱 12번째의 절기로 더위가 정점에 달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