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당신의 님은 어디에

백일홍 같은 침묵 한용운의 생가를 찾아서.

님이라는 표현을 쉽게 할 수가 있을까. 침묵하지 않는 님과 서로의 생각을 소통하고 바라보며 마음속에 품어줄 수 있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 한 번에 모든 것을 다 가질 수가 없듯이 님의 침묵을 다르게 받아들이고 싶다면 그만큼의 노력이 필요하다. 표면적으로는 남녀 간의 아기자기한 사랑의 애환을 노래했던 한용운의 님의 침묵이라는 시를 생각하면서 이별과 그 고통 속에서 참다운 삶의 의미를 깨닫고, 마침내 임과 사랑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

MG0A6605_resize.JPG

홍성에 가면 만해 한용운 생가가 자리하고 있다. 지금 생가의 옆에는 한용운 생가지 역사공원이 조성되고 있었다. 님의 침묵으로 대표되는 시인 만해 한용운은 저항의 시인이기도 하다. 침묵의 의미는 단순한 명상의 침묵이 아니라 생생한 삶의 몸부림과 깨달음이 용솟음치는 생성의 적극적 침묵으로 표현될 수 있다.

MG0A6607_resize.JPG

백일홍이 모두 진 곳도 있지만 아직은 여름이라서 붉게 물들며 피어나는 백일홍은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만해 한용운과의 함께하는 시간을 통해 님의 침묵이 결국 필자에게도 미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MG0A6608_resize.JPG

아마도 님의 침묵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교과서에서나 보던 그런 시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바꾸어서 보면 님의 침묵은 모든 사람에게 해당이 된다. 길을 보여주고 열어준다는 것은 쉽지 않다. 앞에 길이 있을 때와 길 자체가 없을 때의 걸음을 다르기 때문이다.

MG0A6609_resize.JPG

만해 한용운의 생가로 걸어가 본다. 1879년 이곳 성곡리에서 태어난 한용운 선생은 6세부터 성곡리 서당골에서 한학을 배워 9세에 문리를 통달, 신동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고 알려져 있다.

MG0A6612_resize.JPG

싸릿대 울타리로 복원된 만해 선생의 생가는 초가지붕을 얹었으며 방 2칸, 부엌 1칸으로 구성된 일자형 구조로 되어 있는데 만해 한용운 선생을 모시는 사당도 이곳에 자리하고 있다.

MG0A6613_resize.JPG

만해 한용운 선생에게 가장 큰 스승은 선친이었다. 선친으로부터 조석으로 좋은 말을 들었는데 역사상에 빛나는 의인이나 걸사의 언행을 가르 주며 국가사회의 모든 일을 알아듣도록 해주었다고 한다. 바른길로 나아가는 집안 교육은 사람을 만드는데 도움이 된다.

MG0A6614_resize.JPG

불교의 대중화를 위해 만해 한용운은 많은 노력을 했었다. 그리고 3.1 운동으로 나아가며 사람이 걸어가야 할 길을 앞서서 걸어 나갔다. 그가 참여했던 동학혁명의 실패로 그는 몸을 피하기 위해 설악산 오세암에 들어갔다. 거기서 머슴으로 시작한 것이 인연이 되어 불교를 공부하게 되었다

MG0A6615_resize.JPG
MG0A6620_resize.JPG

26세에 강원도 백담사에 들어가 불문에 입도. 삼일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던 그는 불교개혁운동에 일생을 바쳤으며 1944년 6월 69세의 나이로 서울 성북동 심우장에서 별세했다.

MG0A6626_resize.JPG

사랑하는 까닭은 님이 어디에 있는지 찾기 위함일지 모른다. 님의 침묵하지 않을 날을 생각하며 저항의식으로 시를 썼던 만해 한용운 선생이 살았던 시대는 아니지만 지금은 같이 걸어갈 수 있는 사람을 찾아 침묵하지 않을 님이 따뜻한 마음을 품듯이 있어줄 것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물의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