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문화예술촌에서 고흐의 향기를 만나다.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것, 그리고 할 수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황야의 오솔길에 서 있는 아버지를 그리는 일이다. 히스로 뒤덮인 갈색의 황야를 좁고 하얀 모래길이 가로지르고, 그 위에 엄격하게 보이는 개성적인 인물이 서 있는 모습으로. 하늘은 조화롭고 열정이 담겨 있어야 한다." 동생 태오에게 쓴 고흐의 편지에서...
예술가들에게 평온 혹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고통스럽지 않은 상태의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진정한 예술가는 격렬하게 불안함에서 벗어나려고 하고 뿌리 깊은 고뇌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친다. 그리고 그 고독은 평생을 따라다닌다.
공주문화예술촌에서는 1년 연중 다양한 기획전을 열고 있는데 이번에는 빈센트 반 고흐였다. 해바라기를 가장 많이 그렸기에 태양의 화가로 불렸으며 영혼의 화가라고도 불렸다. 일하기 시작한 이후로 습작기간을 거쳐서 자연의 색, 태양의 색을 찾아다녔다. 경제적으로 무척이나 가난했지만 예술에 대한 끝없는 집착은 그를 괴롭히기도 했다. 그런 그를 가장 많이 후원해 준 것은 그렇게 여유 있지 않았던 동생 테오였다.
빈센트 반 고흐는 강렬했다. 자신의 그림을 본 사람들이 이 화가는 정말 격렬하게 고뇌하고 있다고 말할 정도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자 했다.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싶은 마음 그리고 자신을 바라볼 때 그 내면이 고스란히 전달되기를 바란다. 동생과 주고받은 편지의 수는 668 통이었다.
빈센트는 정신요양원에서도 오랫동안 지냈는데 새벽에 일어나 하루 종일 작업하면서 약 70여 점의 그림과 드로잉을 그렸다고 한다. 빈센트는 존경하던 화가 샤를 프랑수아 도비니가 살았던 곳을 방문해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지낸 곳을 그리고 싶어 했다고 한다. 도비니의 정원은 그렇게 그려졌다.
예술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이나 어떤 노력이 통하지 않는 사회에서 좌절하게 된다. 빈센트 반 고흐 역시 노력이 통하지 않는 시대를 살고 있다면서 동생에게 토로하기도 했었다. 그림을 팔지도 못하고 돈을 빌릴 수도 없고 아무 생각 없이 작품활동을 할 수 있는 환경에 처하지 못한다는 것에 대해 좌절했었다.
빈센트와 친구와 같은 사이를 유지했던 사람으로 가셰박사가 있었다. 빈센트가 사망하기 전까지 주치의였는데 그를 그린 작품은 1990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일본의 한 사업가에게 당시 미술품 경매의 최고가인 약 8,250만 달러에 낙찰되면서 화재가 된 적이 있었다. 잠시 주제를 변경해 보면 그때가 일본의 최고였던 해였다. 미친 듯이 풀려나간 돈들이 일본의 부동산과 주식에 잔뜩 거품을 끼게 하고 심지어 미술품시장에도 거품을 만들었던 때였다. 가치에 부합하지 않는 거품은 반드시 꺼진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며 일본은 지금까지 저 모양이 되었다.
그림의 색도 있고 향기도 있다. 어떤 그림은 향기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곳에서는 향기와 그림의 색칠을 통해 빈센트 반 고흐를 만나볼 수 있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빈센트는 나무뿌리를 보며 느껴지는 감정과 그들의 생명력에 영감을 받아 그리기도 했는데 죽기 전 아침에 햇빛과 생명으로 가득한 나무 덤불을 그렸다고 하는데 그 작품의 이름은 나무뿌리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그와 그의 작품을 기억하고 있고 흠모하는 반 고흐가 이 세상을 떠난 지 100년이 넘었다. 지독한 가난과 고독 때문에 힘겨워하면서도 더 나은 작품을 위해 쉼 없이 고투하고, 그 결과 많은 사람을 매료한 작품을 이렇게 남겼다.
“너 하나만이라도 내가 원하는 전체 그림을 보게 된다면, 그래서 그 그림 속에서 마음을 달래주는 느낌을 받게 된다면……. 나를 먹여 살리느라 너는 늘 가난하게 지냈겠지. 돈은 꼭 갚겠다. 안 되면 내 영혼을 주겠다.” 동생에게 이렇게 말했던 빈센트 반 고흐는 37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