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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Mar 05. 2023

노산 (魯山)

홍위(弘暐)로 태어나 단종이 되었지만  청령포에서 죽다. 

날이 너무나 좋았다. 이렇게 좋아도 되나 싶게 이곳의 풍광은 궁궐과 달랐다. 한반도의 좋은 풍광을 본떠 만들었다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축소판에 불과했던 것이다. 숙부였던 금성대군의 집에 머물러 있다가 한양에서 먼 영월이라는 곳으로 오게 되었다. 물이 있고 홀로 있기에 좋은 곳이었지만 부인은 함께 오지 못했다. 숙부 중 가장 나이가 많았던 수양대군 아니 왕이 된 세조가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곳으로 오기 2년 전인 1455년 수양대군은 조카인 단종을 상태왕으로 봉하고 자신이 왕에 오르게 되니 그가 세조다. 종친과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창덕궁으로 가서 상왕이 된 단종과 의독의 존호를 받은 의덕 왕대비에게 하례하였으나 받지 않았다. 이들에게 하례를 받는 것이 무슨 의미겠는가. 어쨌든 의지와는 상관없이 왕에서 끌어내려져서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이며 세조와 정부 관원 등은 술을 마시면서 지극히 즐기다가 파하였다. 

이곳은 강원도 영월군에 자리한 청령포다. 남쪽은 기암절벽으로 막혀 있고 동ㆍ북ㆍ서쪽은 남한강 상류의 지류인 서강(西江)이 곡류하고 있어 배로 강을 건너지 않으면 밖으로 나갈 수 없는 특수한 지형으로 강에 자리한 섬이다. 앞서 상왕이 되고 2년 뒤인 1457년 여름 홍수로 서강이 범람하여 처소를 영월 객사인 관풍헌(觀風軒)으로 옮기기 전까지 단종이 머물던 곳이다. 

누구에게는 비극적인 공간일지 몰라도 서강의 물이 맑아 영월팔경의 하나로 손꼽히는 명소로 청령포는 감입곡류하던 서강이 유로를 변경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아주 잠시 배를 타고 들어가면 된다. 다리가 놓이는 것보다 배를 타고 들어가는 것이 더 어울리는 곳이다. 

2년 뒤인 1457년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이 단종복위운동을 벌이게 되는데 이에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어득해(魚得海)에게 명하여 군사 50명을 거느리고 호송(護送)하게 하였으며 군자감 정(軍資監正) 김자행(金自行)·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 홍득경(洪得敬)이 강등된 노산군을 이곳으로 보냈다. 

노산군으로 강등되고 이곳으로 유배를 올 때 청계천의 영도교에서 헤어지게 되는데 그 이후로 두 부부는 죽을 때까지 다시는 보지 못했다. 노산군이 이곳에 올 때 어머니는 서인으로 강봉 되고 외할머니는 고문받다 사망하였으며 외삼촌은 거열형, 장모와 이모는 노비, 장인은 교형, 부인은 군부인 강봉 되는 등 관련된 사람들은 죽거나 모두 세상에서 흔적이 사라져 갔다. 

외딴섬이지만 홀로 있는 건물들은 고즈넉하니 좋다. 청령포는 1971년 12월 16일 강원도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12월 26일 명승으로 변경되었다.

노산군은 그 길을 가고 싶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세종의 큰 아들인 문종의 아들로 태어난 이홍위는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왕위수업을 받으면서 공부도 많이 했다고 한다. 이곳에는 그의 흔적을 살펴볼 수 있도록 재현을 해두었다. 


세조는 단종 복위운동 이후에 이런 교지를 내렸다. 상왕(上王)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하고 궁에서 내보내 영월(寧越)에 거주시키니, 의식(衣食)을 후(厚)하게 봉공(奉供)하여 종시(終始) 목숨을 보존하여서 나라의 민심을 안정시키도록 하라. 

세상 사람들은 안타깝거나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비극으로 휘말린 이야기에 매력을 느낀다. 지금 단종이 세조보다 더 사랑받는 이유는 그것 때문 일 것이다.  

세상은 그렇게 변했고 지금은 영월을 대표하는 여행지가 되었다. 단종은 1441년(세종 23)에 문종과 현덕왕후 권 씨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지만 그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이곳은 특히 소나무가 많다. 공간에 군더더기가 없다고 할까. 걸어보아도 좋지만 머무르기에도 괜찮은 곳이다. 단종의 어소는 단종이 생전이 머물렀던 곳으로 이곳에서 글을 읽거나 휴식을 취하였으며 밤에 몰래 찾아온 엄흥도와 대화를 나누었던 공간이기도 하다. 

이곳에 중심이 되는 나무는 영월 청령도 관음송이다. 천연기념물 제349호 지정이 되어 있는데 나무의 나이는 알 수가 없으나 조선왕조에서 단종이 유배생활을 할 때 이 나무의 갈라진 가지 사이에 앉아서 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이 소나무를 관음송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나무가 당시 단종의 비참한 모습을 보았다고 하여 볼 관, 들었다고 하여 소리음자를 써서 관음송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곳에 온 지 4개월쯤이 되었을까. 단종은 1457년 10월에 사약을 받게 되었으나 그의 죽음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단종의 장인인 송현수가 금성대군과 함께 단종 복위를 꾀했다는 혐의로 교수형에 처하라는 명을 내렸는데 이에 단종이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고 한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자주 등장했지만 1956년에 20살이었던 엄앵란이 단종애사에서 단종의 왕비로 연기했는데, 단종애사는 엄앵란의 데뷔작이기도 하다. 


"시녀와 시종 들이 다투어 고을 동강(東江)에 몸을 던져 죽어서 둥둥 뜬 시체가 강에 가득했고, 이날에 뇌우(雷雨)가 크게 일어나 지척에서도 사람과 물건을 분별할 수 없고 맹렬한 바람이 나무를 쓰러뜨리고 검은 안개가 공중에 가득 깔려 밤이 지나도록 걷히지 않았다." - 연려실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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