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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Mar 15. 2023

샤잠 신들의 분노

어쩌면 관객들이 더 분노할지도 모른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눈높이를 사정없이 낮추어버린 것 같은 영화 샤잠 신들의 분노를 개봉 첫날 감상했다. 무언가 엉성하고 콘셉트처럼 아이들이 성장기인 것 같은데 제대로 성장은 하지 못하고 신들은 자중지란을 일으키며 악역으로서의 역할도 애매해져 버렸다. 전체적으로 얼기설기되어 버린 스토리 속에 어떤 관점을 가지고 봐야 하는지 좀처럼 찾을 수가 없었다. 신들의 힘을 갖게 된 빌리와 친구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슈퍼히어로의 삶을 즐기게 살던 그들 앞에 잃어버린 힘을 되찾고자 그리스 여신 헤스페라와 칼립소가 나타나 벌어지는 이야기다. 

샤잠의 후계자로 선택받고 솔로몬의 지혜, 헤라클레스의 힘, 아틀라스의 체력, 제우스의 권능, 아킬레스의 용기, 머큐리의 스피드까지 신의 능력을 합쳐서 앞 단어만 이어 붙이면 샤잠이 된다. 빼앗긴 능력을 되찾기 위해 신들은 마법사의 지팡이를 훔쳐 신화 속 괴물들을 소환시키고 세상을 혼돈에 빠트린다. 

캐릭터에 생명을 부여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다시금 보게 된다. 그렇게 많은 비용을 투자하고서도 그 한계가 드러나는 것을 보면 마블이나 DC코믹스나 세계관을 확장시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직접 보여주고 있다.  업그레이드된 세계관은 물론이며, 한층 더 업그레이드된 액션과 스케일은 조금 있었을지 몰라도 조금은 뜬금이 없는 장면이 많이 연출된다. 

신이라는 존재가 과연 선한 존재인지는 생각해 볼 일이다. 우리는 보통 신이 있다면 신은 선한 존재일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사람이 원하는 신의 모습은 분명히 선한 존재일지 몰라도 막강한 힘을 가진 신이 있다면 그렇게 인간들에게 선할 것 같지는 않다. 사람의 생명은 그들에게 그렇게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생명의 나무다. 전체적으로 버드나무 형태에 촉수를 연상케 하는 가지, 거미다리와도 같은 뿌리를 지닌 이 나무를 통해 커비는 때로는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우며, 때로는 생명을 부여하는 음과 양의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 

그나마 마음에 들었던 것은 마지막 장면에서 원더우먼이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주인공인 샤잠이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슈퍼히어로로 등장한다. 참고로 샤잠이나 원더우먼 모두 DC코믹스 캐릭터라 등장할 수가 있다. 갤 가돗이 다시 원더우먼으로 나올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지만 그래도 원더우먼의 모습으로 등장한 모습만 보아도 반가웠다. 아무튼 이 영화를 보고 싶다면 샤잠을 외쳐서 초등학교 때로 돌아가서 보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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