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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Apr 02. 2023

동쪽에서 일어난 道

동학운동이 처음 일어난 고창의 무장읍성 

사람이 걸어가야 하는 수많은 길이 있다. 어떤 길이 옳을지에 대해서는 각자의 기준에 따라 다르다. 역사의 변곡점에는 항상 먹고사는 문제가 있었다. 인류역사에서 항상 좋은 때만 있지도 않았고 나쁜 때만 있지도 않았다. 사람의 지성은 더 무르익어가고 있지만 여전히 불안정한 것은 인간이 가진 가능성 때문일지도 모른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조선 말기에 서민들이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았는지는 알 수 있지만 직접적으로 체감할 수는 없다. 그냥 가늠해 볼 뿐이다. 

이곳은 조선말기에 동학농민운동이 최초로 일어난 고창의 무장읍성이라는 곳이다. 전라도의 여러 고을에서 장정과 승려 2 만수천명이 동원되어 둘레 1,470척(尺), 높이 7척의 성벽을 쌓고, 성 위에 높이 1척짜리 여장(女墻 : 성위에 낮게 쌓은 담) 471개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곳에는 해자가 있었는데 그런 흔적이 있었다는 팻말만 볼 수가 있다.  둘레 2,127척의 해자(垓字 : 성 밖으로 둘러 판 못)를 파서 견고히 하고, 병마사가 현감을 겸직하는 진(鎭)을 베풀었던 곳이다.

전국에 있는 읍성 대부분을 가보았지만 고창읍성은 상당히 그 흔적이 잘 보존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현재의 읍성은 사두봉(蛇頭峰)이라 부르는, 남북으로 기다란 구릉을 중심으로 하여 평원을 마름모꼴에 가깝게 네모지게 성벽이 감싸고 있다. 

들어가는 문인 진무루(鎭茂樓)가 있으며, 성안에는 옛 고을의 풍모를 알 수 있는 객사와 동헌이 있는데, 객사는 송사관(松沙館)이라 하여 옛 무송·장사의 끝자를 따서 이름 지었다고 한다. 

 ‘동학’이란 교조 최제우가 서교(西敎:천주교)의 도래에 대항하여 동쪽 나라인 우리나라의 도를 일으킨다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자연의 산천초목에 이르기까지 한울에 내재한 것으로 보는 물물천 사사천(物物天事事天)의 범천론적 사상(汎天論的思想)이 널리 서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사실이지만 사실 먹고 살 것이 없어서 동학에 들어간 사람들도 많다. 

풍경은 이렇게 보여도 무장읍성에도 봄은 찾아왔다. 좀 많이 걸으면 덥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서민들에게도 힘이 있다는 것을 알린 것은 바로 민족운동의 시작이었다. 동학은 서민층에 뿌리를 내려, 3·1 운동에 나타난 자주독립의 민족주의 역량을 키운 민족운동 세력으로 근대사에 빛나는 업적을 남긴 것이 사실이다. 

조선말기에는 정말 많은 양반들이 나왔다. 특권층이 일반 서민들보다 많아지는 현실 속에서 양반사회의 신분 차별에 대한 서민들의 불만이 커져갔다. 

온기가 도는 무장읍성에서의 시간이 좋다. 읍성이 이런 형태로 만들어진 곳은 많지가 않다. 

동학을 이끌었던 청소년기 최제우의 내면적 갈등은 문장 도덕이 높으면서도 벼슬을 못한 아버지에 대한 동정, 가문을 위하여 입신양명을 할 수 없는 서출로서의 자기 처지, 비천한 신분의 생모에 대한 열등감이 있었다. 

1894년 일어났던 동학 농민혁명은 이곳 무장읍성에서 맨 처음 봉기하였던 역사의 현장에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본다. 130년쯤이 지난 지금 우리는 더 풍요로워지긴 했지만 삶의 무게가 덜어졌는지는 돌아봐야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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