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는 누군가 May 14. 2023

복원 (復元)

원래의 모습을 찾아가고 있는 연해에 자리한 하동읍성

사람이 사는 곳은 100년만 지나도 그 흔적을 알아보기 힘들 만큼 변화가 일어난다. 한국의 대도시만 보아도 30여 년만 지나면 원래의 모습이 사라질 정도로 빠른 변화를 보여왔다. 한국의 주거형태도 기와집과 초가집의 1층에서 콘크리트가 도입되면서 2층과 3층, 아파트로 주거문화가 발달하면서 도시의 밀집도는 높아져갔다. 그 와중에 읍성이나 천변을 중심으로 발달했던 자연취락의 형태는 흩어져서 지금은 지역마다 오래된 지명만이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주고 있다. 

역사적인 공간을 복원하는 경우는 그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새로워지는 것은 좋을 때도 있지만 오래된 것의 가치는 미래를 지향하는 것이다. 하동읍성을 처음 방문했을 때가 10여 년 전이었는데 지속적으로 복원과정을 거쳐서 오늘날의 모습이 되어 있다. 

산성의 경우 대부분 군사적인 목적으로 지어졌기에 일반 백성들이 사는 경우는 전시가 아니고는 많지가 않았다. 대부분이 평지에 자리했던 읍성은 그 지역의 행정적. 군사적 중심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동읍성의 경우도 바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이 부근의 읍성은 현재 복원이 되어서 산등성이를 따라 석축이 쌓여 있었다. 임진왜란에서 중요했던 인물 이순신은 7월 18일 새벽 이덕필과 변홍달로부터 원균의 칠천량 해전 참패 소식을 듣고 통곡하여 이 부근을 백의종군하면서 걸어간 곳이다. 

하동읍성(河東邑城)은 1417년(태종 17)에 축조한 성곽으로 1593년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 군대에 의해 성이 함락되었으며 이때 객사, 관아, 향교 등이 불에 타 소실되었다고 한다. 

해발 149m의 양경산에 위치하고 있는 하동읍성은  조선 전기 산상(山上)에 축조된 산성에 가까운 포곡식 석축 성이다. 

성벽은 마치 날줄과 씨줄이 얽혀서 만들어진 것처럼 견고해 보인다. 지금처럼 파괴적인 현대식 무기가 있기 전까지 돌로 쌓인 성벽을 파괴하는 것은 쉽지 않았기에 보통 약한 부위를 공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하동읍성이 위치한 고전면 고하리는 삼한시대의 변한 12국 중 낙노국(樂奴國)에 속한다고 추정하고 있는데 낙노국의 옛터인 악양면 일대 삽암, 한산사, 고소성, 들판에 우뚝 서 있는 두 그루 소나무, 동정호, 낙노국의 솔봉토성, 입석리 선돌도 남아 있다.  

하동읍성에는 배수길을 비롯하여 하동읍성내에서 식수로 사용했었던 곳의 흔적도 남아 있다. 

옛 학문(學問)을 되풀이하여 연구(硏究)하고 현실(現實)을 처리(處理)할 수 있는 새로운 학문(學問)을 이해(理解)하여야 비로소 남의 스승이 될 자격(資格)이 있다는 의미가 온고지신이다. 예스럽지만 복원된 하동읍성을 통해 이곳의 주거문화와 마을 이야기를 만들어서 역사 트래킹길을 만드는 것도 좋을 듯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동쪽에서 일어난 道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