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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Jun 07. 2023

나로 살아가기

봉화 청량산에 들러 최치원으로 살아보기 

자기 자신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자기 자신이 살아 있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가학적으로 자신에게 상처를 입힐 수도 있고 맛있는 것을 먹으면서 자신이 무언가를 섭취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방법도 있다. 그렇지만 여전히 자기 자신 그대로 살아가고 있는지는 모호할 때가 많다. TV에서 관찰예능을 사람들은 많이 본다. 연애, 육아, 혼자 살기, 여행, 먹방 등 자신이 직접 경험하지 않은 무언가를 경험하기 위해 누군가 경험하는 것을 보고 때론 즐거워한다. 그렇다면 나로 살아가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이곳은 청량산입구에 자리한 청량산 박물관이라는 곳이다. 청량산에 찾아갔던 사람들이나 청량산을 터전으로 살아가던 동물이나 청량산에 기반에 봉화군 지역의 역사를 볼 수 있는 곳이다. 다른 누군가로 살아보는 것은 꼭 미디어를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관점의 변화를 통해서 가능하기도 하다. 

청량산은 과거에 수산이라고 불렸던 산이다. 말 그대로 물이 많은 산이라는 의미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조선시대에 와서는 대부분 청량산이라는 기록만이 남아 있다. 

오래전에 색다른 아이디어가 영화로 만들어진 적이 있다. 지금도 왕성한 활동을 하는 존 말코비치라는 배우로 살아보는 존 말코비치 되기다. 영화 속에서도 유명한 배우로 등장하는 존 말코비치는 많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많은 사람들이 유명한 누군가가 되고 싶어서 지금도 그렇게 살아간다. 유명한 것은 잘 알려지지 않은 것보다 기회가 많기 때문이다. 

고운 최치원은 청량산에 머무는 시간이 많았다고 한다. 최치원은 이곳 풍혈대에서 적지 않은 시간을 머물렀다. 의식의 통로가 있다면 누군가가 되어보는 것도 가능할 수가 있다. 지금의 기술로는 할 수가 없겠지만 사람의 의식은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청량산에는 많은 동물들이 서식하고 있지만 그 동물들을 보는 것은 쉽지가 않다. 많은 시간을 머물러야 하고 동물들은 사람을 피해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윽하고 담백한 흥취를 간직한 청량산의 산세를 유학의 성산으로 여기며 청량산 유산을 통해 자신들의 도학 정신을 연마해 나갔다고 한다. 

청량산에는 치원봉이라고 불리는 금탑봉이 있다. 청량산에는 최치원이 돌아다니면서 적지 않은 흔적을 남겼기에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풍혈대는 최치원이 독서하고 바둑을 즐긴 곳이며 극일암터는 신라의 명필인 요극일이 최치원의 글씨를 배우기 위해지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사람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기억을 보존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일기를 쓰는 사람도 있고 공개된 채널에 자신의 글이나 영상을 남기기도 한다. 만약 그 순간을 모두 기억해서 그 상황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술이 있다면 존 말코비치 되기나 최치원 되기가 아니라 나로 살아보기가 가능하지 않을까. 

청량산 박물관에는 많은 사람들의 기록이 있어서 그 자취를 따라갈 수가 있다. 어떤 것은 길이 되고 어떤 경험은 책이 된다. 때론 남아 있는 물건을 통해 그때의 생활상을 엿볼 수가 있다. 

최초의 청량산 유산기는 신재 주세붕이라는 사람이 썼다고 한다. 청량산의 봉우리를 유교적 명칭으로 명명하였으며 풍기 군수로 부임한 지 4년 만에 50세의 나이로 청량산을 다녀와서 유산기를 남겼다고 한다. 


지금도 예루살렘은 여러 종교의 성지로 인식되어 많은 종교인들이 방문을 하고 있다.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와 같은 철학은 유학이다. 청량산은 단순히 풍류를 즐기는 장소가 아니라 선형의 정신을 되새기며 그들이 남긴 유적을 순례하는 성지로 인식되는 곳이기도 하다. 

지구의 역사에 비하면 인간새의 역사는 찰나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100여 년을 차마 살지 못하고 떠나갔기에 역사에 대한 기록을 남기려고 한다. 삼학사중 홍익한은 봉화출신이었다고 한다. 청 태종 앞에서 굽히기를 거부하던 그는 처형당했지만 조정은 이들을 기르기 위해 정문을 내렸으며 홍익한에게는 충정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고 한다. 

나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영화 속에서처럼 커다란 구멍으로 들어가면 그 사람의 오감으로 세상을 인식하게 된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 타인을 통해 자아를 실현할 수가 있다면 그 자아는 온전한 것인가 혹은 그릇된 것인가. 나로 살아가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은 것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온전한 자신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많지가 않다. 앞으로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온전한 자신으로 살아간다면 고운 최치원 같은 사람처럼 기억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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