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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Aug 02. 2023

야은 길재 (冶隱 吉再)

선산에 낙향하여 머물렀던 길재를 기린 구미 금오서원

구미라는 지역이 도시로 발돋움한 것은 1961년  5·16 이후 1963년 읍(邑)을 시점으로 산업화과정에서 공업지역으로 발전하면서 1978년 시(市)로 승격됐다. 아주 적은 인구가 살았던 구미(龜尾)라는 지역은 원래 선산군(善山郡)의 면(面) 지역이었다. 선산은 물산과 인구가 풍부하고, 사육신의 한 사람인 하위지(河緯地)를 비롯해 길재(吉再)·김종직(金宗直) 등 많은 인물이 배출된 곳이기도 하다. 선산이라는 지역이 원래 중심 지였던 곳이다. 

덥기는 정말 더운 것이 1,000 보정도만 걸었을 뿐인데 땀이 그냥 줄줄 흘러내리는 날이다. 구미의 금오서원에 갔더니 문화해설사분이 이 더운 날 찾아오셨냐고 하면서 말을 건넨다. 

구미의 금오서원에는 원계 칠조(院戒七條)가 있다고 한다. 


汚穢窓壁(오예창벽: 서원주위는 더럽히지 말 것) 

損傷書冊(손상서책: 서책이나 기물을 손상하지 말 것) 

遊戱廢業(유희폐업: 서원에서 노래하고 춤추지 말 것) 

群居無禮(군거무례: 떼 지어 무례한 짓 하지 말 것) 

干索酒食(간색주식: 술과 고기는 삼갈 것) 

說話亂雜(설화난잡: 대화는 조용하고 음담패설을 하지 말 것) 

衣冠不正(의관부정: 의관은 부정하게 하지 말 것) 등 하지 말 것 등 7가지를 정해 놓았다. 

구미의 대표적인 인물이기도 한 야은길재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금오서원은 1575년(선조 8)에 사액서원으로 승격됐으나,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소실돼 1602년(선조 35)에 지금의 선산읍 자리에 옮겨지었다. 

야은 길재는 1389년(창왕 1)에 문하주서(門下注書)에 임명됐으나, 이듬해 고려의 쇠망을 짐작하고 노모의 봉양을 구실로 사직했다. 조선이 들어설 것을 알게 된 야은 길재는 1390년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충절에서 은거하기로 작정하고, 낙향해 금오산 기슭에 오두막을 짓고 살았다.

금오서원에 경내 건물로는 상현묘, 정학당, 동재, 서재, 읍청루, 고직사 등이 전학 후묘의 형식에 따라 배치되어 있다. 서원에는 성리학의 대통을 이어받은 김종직(金宗直), 정붕(鄭鵬), 박영(朴英), 장현광(張顯光) 등을 추가로 배향해 5현의 위패를 모셨다.

길재의 출생지인 봉계리를 향해 남향으로 서 있는데, 앞쪽으로 감천(甘川)과 낙동강이 만나는 물길이 내다보인다. 길재(吉再, 1353년~1419년)는 고려 후기의 문신이자 고려 말 조선 초의 성리학자이다. 본관은 해평, 자는 재보(再父), 호는 야은(冶隱) 또는 금오산인(金烏山人)이다. 

조선이 건국된 후인 1400년(정종 2년)에, 전부터 친하게 지내던 태종 이방원이 그에게 태상박사의 벼슬을 내렸으나,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 하여 거절하고 고향인 경상북도 선산(善山)에서 후학 양성에 힘썼다.

오서원을 둘러보는 길은 잠시의 여유이며 인문학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정학당이라는 교실과 같은 용도로 사용되는 중심건물의 형식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단층 맞배지붕 건물로 겹처마로 되어 있으며 5량 형식의 가구구조를 가지고 있다. 

"배우기를 좋아하는 것은 지혜로움에 가깝고, 힘써 행하는 것은 인자함에 가까우며, 부끄러워할 줄 아는 것은 용맹함에 가깝다."


조망을 할 수 있는 금오정이라는 정자는 선산의 앞을 흐르는 감천 너머 물목 마을 뒤 황산(皇山)은 수컷인 봉이 암컷인 황을 만나야 한다는 의미로 지어졌다고 한다. 

구미의 진산이기도 한 금오산과 금오서원의 금오(金烏)는 해를 달리 이르는 말이다. 태양 안에 황금색의 세발 까마귀가 있다고 한 신화에서 ‘금오(金烏)’ 혹은 ‘적오(赤烏)’가 유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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