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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Aug 05. 2023

산중일기

우담(愚潭) 정시한(丁時翰)을 기린 도동서원(道東書院) 

한 사람의 기록은 그 사람에 국한된 것처럼 보이지만 어디에 머무르느냐에 따라 귀중한 자료로 활용이 될 수가 있다. 그날의 일과 자신의 감상이 여행길과 이어지면 완전히 개인적인 것은 아니다. 옛날 사람들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기록을 남겼던 것들이 적지가 않다. 그중에 원주에 자신의 터전이 있는 우담 정시한이라는 사람이 쓴 산중일기로 잘 알려져 있다. 

건물 대부분이 완공되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이곳은 원주의 도동서원이라는 곳이다. 도동서원은 우담 선생의 문인들이 조선 숙종 37년(1711) 2월에 폐(閉) 법천사지(法泉寺址)에 광암사(廣巖寺) 도동서원 건립을 시작하여 숙종 47년(1721) 9월에 위판을 봉안(奉安)하고 제례를 봉행한 이래 지방 교육 기관으로 많은 인재를 양성해 오던 곳이었다고 한다. 

나주 정 씨의 후손들은 법천사지 발굴조사로 인해 소실된 위치가 영구히 사라지게 됨에 따라 문중에서 뜻을 모아 법천사지 북쪽 산 193번지 일원에 문중에서 예산을 들여 복원한 곳이라고 한다. 

우담 정시헌은 강원도 원주 법천(法泉)으로 낙향하여 평생 벼슬길을 멀리하였는데 그 시작이 된 것이 1690년(숙종 16)에 올린 만언소(萬言疏)다.  ‘왕의 마음을 바로잡을 것’, ‘집안 다스리기를 엄격히 할 것’, ‘나라의 근본을 배양할 것’, ‘조정을 바르게 할 것’, ‘인재를 쓰고 버림에 신중히 할 것’, ‘언로를 열 것’의 6조를 제시하였는데 그 글이 보기가 싫었던 숙종이 관직을 삭탈하였다. 

올해 초에 준공이 될 예정이었는데 여름에 공사가 마무리가 된 듯 보였다. 도동서원은 우담 선생 선양사업은 물론 지역 문화유산으로 시민들의 전통 유교 문화교육 공간으로 활용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한옥건물은 짓는데 적지 않는 비용이 든다. 정시헌의 묘소는 원주에 있다. 조선의 역사에서 여성 때분에 파가 심각하게 갈린 것은 숙종 대이지 않을까. 인현왕후와 희빈장 씨 사이에서 많은 선비들이 삭탈관직과 벼슬길에 복귀하는 등의 갈림길에 섰다. 

1691년 서인을 몰아내고 남인이 집권한 기사환국이 일어나자, 정시한은 남인에 속하면서도 인현왕후를 폐위시킨 일은 잘못이라고 소를 올렸다가 삭탈관직당하였다. 

옳고 그름에 대한 기준은 과연 무엇일까. 그는 자신이 속한 정당과 상관없이 옳고 그름에 대한 기준이 명확했다. 그의 기록 중에서 전국의 명승과 서원에 대한 쓴 책으로 산중일기가 있다.  

정시한(丁時翰: 1625∼1707)이 62세 때인 1686년(숙종 12) 3월부터 1688년(숙종 14) 9월까지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 일대의 명산 고찰 및 서원 등을 여행하면서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유람기가 산중일기다. 

도동서원의 건물들을 보니 전통적인 한옥을 건축하는 방식으로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정시한은 3년(22개월, 총 600일)에 걸쳐 네 차례의 여행 동안 전국의 명산 고찰을 유람하면서 매일매일 그날의 일과 자신의 감상을 산중일기에 기록하였다.


배우고 익히고 기록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서원등에서 볼 수 있는 행(杏)은 살구나무이기도 하고 은행나무이기도 하다. 정시헌은 대사헌 정윤복(丁胤福)의 증손이고, 아버지는 관찰사 정언황(丁彦璜)이며, 어머니는 횡성조씨(橫城趙氏)로 직제학 조정립(趙正立)의 딸이었기에 매우 유복했던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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