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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Aug 08. 2023

사형수

과연 형벌은 어떻게 주어져야 하는가에 대한 담론

점점 더 이유를 찾기 힘든 강력사건들이 발생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시간이 갈수록 계속 나올 것으로 보고 있다. 많게는 3대가 함께 살아가던 방식에서 이제는 핵가족화를 넘어서 1인가구가 점차로 확대되고 있다. 그런 경향은 사람들과 접촉하고 정을 느끼고 유대관계를 지속할 수 있는 기회가 없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섬이라고 부를만한 아파트단지에 거주하면서 옆에 누가 사는지 모르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렸다. 사람이라는 존재를 더 이상 존중하고 자신과 같은 대상으로 보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죄를 지으면 보통 법원에서 형을 부여받게 된다. 아마도 법원에서 앞으로는 사형을 선고하는 경우는 점점 더 줄어들 것이다. 사형을 선고받은 사람이 감옥에서 재소자를 살해하는 사례가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한다. 희망이 없는 사람에게 한 명을 죽인 들 몇 명을 더 죽인 들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법원은 사형대신에 무기징역을 선고하는데 여기에 맹점이 있다.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사람은 20년이 지나면 가석방 대상으로 올라갈 수가 있다. 그렇지만 40년형을 선고받은 사람은 잔여형기가 10년 미만일 때 가석방을 신청할 수가 있다. 무언가 이상하지 않은가. 40년형보다 무기징역이 더 엄한 벌인데도 불구하고 사회에 나올 수 있는 기회는 무기징역이 더 유리하다. 


감옥에는 별별 사람이 다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공통적인 것은 사형수는 웬만하면 건들지 않는다고 한다. 의외로 연쇄살인범이나 무기징역을 받은 사람들이 더 많은 운동을 한다고 한다. 운동을 적극적으로 하는 이유는 밖에 나갈 경우 살인을 하기 위한 체력을 유지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검찰과 경찰이 수사권을 두고 서로 실랑이를 하고 정치권에서 그걸 가지고 상대방을 공격하는 사이에 수사의 공백이 생겨버렸다. 수사의 공백은 치안의 공백으로 이어졌고 자연스럽게 코로나19 이후에 폭발된 범죄로 드러났다. 


1997년 이후에 살인집행이 이루어진 적은 없다. 과연 인간은 어떤 존재로 봐야 할까. 어차피 세상은 혼자 사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만이 대안이 될 수가 있을까. 사람은 어떤 것을 지향해야 할까. 사는 것이 파멸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라 해도, 이 세계 속에서 사랑과 욕망을 찾아 걸어 나가겠다고 말했던 알베르 카뮈처럼 사랑을 추구하는 것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알베르 카뮈의 소설 페스트에서는 모든 자유가 제한되는 상황 즉 감옥 속의 인간을 상징하였다. 모순에 찬 삶 평온한 삶 위에 덮친 모순과 허망, 즉 부조리 속에서 그 상황을 직시하고, 낙관적 기대 없이 묵묵히 그 허망과 맞서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부조리는 언제든지 생겨난다. 해소가 된 것 같지만 여전히 곁에 머물러 인식의 오류를 만들어낸다. 상상할 수 없고 예측하지 못한 폭력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성찰하는 것이 필요한 때가 아닐까. 


외부와 단절된 채 살아가는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감옥과 다른 점이 무엇인지 느낄 수가 있을까. 그들에게는 감옥에서 기회를 찾지 못하는 것이나 낙관적인 기대 없이 갇혀사는 듯한 자신의 집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할 수가 있다. 쉽게 형벌에 대해 이야기할 수가 없다. 우리는 여전히 어딘가에서 생겨날 수 있는 그런 존재들을 아주 가까이에 두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신은 보지 못하는 그런 누군가가 있다면 사회를 바꿀 수 있는 조금의 노력을 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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