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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Aug 07. 2023

부조리

세상을 살아가는데 어떠한 이유 같은 것은 없다. 

사람들은 부조리를 경험할 때 상당히 불편해진다. 예를 들어 사람이 사람을 해치는 데 있어서 어떤 이유 같은 것이 필요하기에 여러 가지 사유를 가져다 댄다. 피해자를 강조하기 위해 성실한 가장, 결혼예정, 신혼한 지 얼마 안 된 신랑 혹은 신부, 청년등에 대한 타이틀을 붙여준다. 성실하고 어리고 혹은 결혼을 한지 얼마 되지 않는 사람의 죽음은 더 안타깝게 느껴야 하는 것일까. 세상은 이미 충분히 부조리하다.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착하게 살고 열심히 살면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타인을 괴롭히고 악하게 산다고 해서 안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것도 아니다. 악인이 더 못하는 것도 아니고 선한 사람이 잘 사는 것도 아니다. 물론 부조리를 느낄 수는 있지만 자연은 사람이 느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구애를 받지 않는다. 


사회와 단절되어 살아가다 보면 자신이 어떤 부조리에 대한 관점을 가지고 있는지 잃어버리는 때가 온다. 최근에 일어난 사고는 그런 단절된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과연 석방 없는 종신형이나 형량을 강화한다고 해서 그런 사고 없어질까. 필자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그 상황까지 가게 되면 옳고 그름에 대한 기준이 사라져 버린다. 그 상황에 이른 사람에게 사람 생명의 가치나 존엄을 아무리 이야기해 봐야 이해할 수가 없다. 그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데 납득을 시킬 수 있을까. 


분명히 그들에게 트리거가 되는 작은 사건들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전체적인 사회분위기가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흐르면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는 자유도를 주게 된다. 사실 사회가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것도 상당히 부조리한 것이기도 하다. 정상, 비정상, 옳고 그름은 그냥 사람의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알베르 카뮈가 쓴 소설 이방인은 그런 부조리를 잘 그려내었다. 현대인의 무감수성에 대해 비판하며, 실존주의 철학으로 묘사해 낸 가공의 인물이자 현대인을 닮은 뫼르소는 그냥 사람을 죽인다. 


감수성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공감과 소통 같은 것을 말하지만 사실 그걸 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많지가 않다. 자신이 가진 생각에 갇혀서 그것이 옳다고 믿고 어떤 노력을 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자신의 생각과 맞지 않으면 배척을 한다. 철학에서는 '의미를 전혀 찾을 수 없는 것'을 뜻하는 부조리는 인간이나 세계가 그 자체로서 부조리한 것은 아니다. 모순되는 두 대립항의 공존 상태, 즉 이성으로 모두 설명할 수 없는 상태가 바로 부조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세상 그 모든 것을 이해할 수는 없다. 인간은 죽음이라는 분명한 한계를 갖고 있기 때문에 '영원'에 대한 환상을 품는다거나, 다가올 내일에 대해서 희망을 품는 것은 결국 끝이 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잘살아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며 살아가고 그걸 유혹하는 사람들도 많다. 더 많은 것을 누리려고 하다 보면 결국 부조리라는 벽을 자신이 그대로 느껴야 할 수밖에 없다.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누구에게 물어봐야 할까. 언론과 지식인들, 정치인들은 어떤 방향을 지향해야 할까. 가장 부조리한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면 세상에 더 많은 안 좋은 일들이 일어날 수가 있다. 누구에게도 공감할 수 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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