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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Aug 10. 2023

구형왕릉 (仇衡王陵)

김유신에게 피를 이어준 사람이 묻혀 있는 산청

'네가 어찌 주인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이리 하였느냐' 김유신이 당연히 그녀를 찾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동물 말은 자신의 주인손에 죽게 된다. 오늘날로 말하면 너무나 취해서 어디로 가는지 말을 안 한 오너를 사랑하는 그녀에게 데려다주었다가 해고될 수도 있는 운전사의 모습을 보는 것만 같다. 필자가 어릴 때 보았던 김유신과 김춘추와 관련된 책에서 보았던 설화중 하나다. 김유신에 대한 이미지는 진골의 한계, 김춘추와 여동생의 관계, 천관녀와의 사랑, 어머니의 말을 잘 들어서 자리 잡았다는 그런 것들이었다. 

김유신이 통일신라에서 확고한 자리를 잡을 수 있는 것은 무관으로서의 그의 능력이나 정치력도 있지만 적어도 증조부였던 구형왕의 결단 때문이기도 했다. 김해에 가면 있는 김수로왕의 10대손이기도 한 구형왕은 521년 가야의 왕이 되어 532년 신라 법흥왕에게 영토를 넘겨줄 때까지 11년간 왕으로 있었던 사람이다. 왕에서 내려오고 싶은 사람은 역사에서 손을 꼽을 정도로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그 구형왕이 잠들어 있다는 이곳은 산청이라는 곳이다.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이곳은 왕릉 중 가장 독특한 곳이기도 하다. 신라에 흡수되기 전에 가야의 6국은 독자적인 정치체제로 영화를 누리기도 했지만 백제나 신라처럼 통일왕조를 만들지 못하고 연합국가의 형태로 운영되었기에 각개 격파되는 것처럼 하나씩 사라져 갔다. 

김유신이 진골의 한계가 있었다고 하나 오늘날의 기준으로 본다면 금수저 중 금수저였다. 금관가야의 구형왕이 백제가 아닌 신라에 고스란히 자신의 왕국을 넘긴 탓에 왕족의 권리는 대부분 누릴 수가 있었다. 구형왕의 아들이었던 무력이나 손자인 서현은 신라에서 무게 있는 벼슬을 받을 수 있었고 김유신에게 큰 기회를 줄 수가 있었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동의보감 발간 410주년을 맞아 한방약초 및 항노화의 도시, 산청에서는 전통의약으로부터 찾는 무병장수의 꿈을 실현할 콘텐츠를 한 자리에 담은 ‘2023 산청세계전통의약 항노화엑스포’가 열리게 된다. 청정자연 산청과 유구한 역사문화가 이곳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위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이 유독 맑은 곳이지만 저 아래쪽으로 흘러내려오는 물은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설화로 고구려 자격이 김유신을 죽이려고 할 때 나림, 혈례, 골화라는 세 여신이 나타나서 이를 알려줘 목숨을 건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사람의 운이라는 것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지만 구형왕-김무력-김서현-김유신으로 이어지는 운의 흐름은 끊어지지 않은 것을 보게 해 준다. 김유신의 어머니이기도 한 만 명 부인이 여자를 쫓아다닌다며 출가를 하라는 선언까지 떨어지자 김유신도 엎드려 울며 자신의 행동을 부끄러워해서 천관에 대한 그리움을 꾹 참고 다시 그 집에 들르지 않기로 했다는 것은 그녀의 신분 때문이었을까. 

걸어 올라와서 아래를 바라보니 비가 온 날의 구형왕릉은 또 다른 색채를 보여주고 있음을 알려준다. 많은 기담과 전설을 남겨 영력이 강한 장군으로 인식되었기에 김유신을 신으로 모시는 사당들도 있다. 

김유신의 부인 지소부인은 655년에 김유신과 혼인했는데, 김유신이 죽은 후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으며 성덕왕 때까지도 생존해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 지소부인의 어머니는 김유신의 둘째 여동생이다. 즉 외삼촌과 조카가 결혼한 현재의 기준으로 보면 이상한 관계다. 

독특한 돌무덤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는 구형왕릉에는 다른 왕릉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 모습들이 기이한 것들도 있고 단언해서 말할 수 없는 것들도 보인다.  무덤의 정상은 타원형을 이루고 있다. 돌무덤의 중앙에는 ‘가락국양왕릉’이라고 쓰인 비석이 있고 그 앞에 석물들이 있는데 이것은 최근에 세운 시설물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오르내리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에서 타당성을 찾는다. 사람은 의외로 비이성적인 정보에도 신념을 가질 때가 있다. 김유신이 오랜 시간을 전쟁터에서 보낸 뒤에 자신의 집을 들를 기회가 있을 때 그냥 우물(경주 재매정 사적 제246호) 물을 한 바가지 떠오라는 한 뒤에 그 물을 마신다음 “우리 집 물맛은 옛날 그대로구나”라며 다시 전쟁터로 떠나 군사들의 사기를 올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금관국의 임금 김구해(金仇亥)가 왕비 및 세 아들인 장남 노종(奴宗), 중남 무덕(武德), 계남(季男) 무력(武力)과 함께 국고(國庫)의 보물을 가지고 신라에 항복하였다.” - 신라본기 법흥왕 19년(532)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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