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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누군가 Aug 18. 2023

병부상서 강민첨

하동에 남겨진 진주강 씨의 강민첨장군의 두방재

한국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중국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가 없다. 지금도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국경을 맞대고 있지는 않지만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나라가 중국이다. 중국의 역사 속에서 중심이 되었던 국가는 중원을 장악했던 나라들이다. 이민족이 중원을 장악해서 나라를 세운 대표적인 국가가 원나라다. 그렇지만 넓은 면적을 지배했던 수많은 국가들이 있다. 유목민족이던 거란의 왕조중 요나라가 있다. 

최초의 국호인 ‘거란’은 종족명을 국호로 사용한 것으로써 요 태조 야율아보기가 제정했고 두 번째 국호인 '요(대요)'는 946년(태종 회동(會同) 7년)에 처음 제정했다. 요나라를 언급한 것은 강성했던 그 나라의 군대를 대파하였던 강민첨 장군의 사적지인 두방재를 찾아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곳은 마치 진주강 씨의 성역과 같은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굽이굽이 들어와서 보니 상당히 넓은 규모의 사적지가 조성된 것을 볼 수가 있다. 

강민첨 장군의 본관은 진주(晉州)로 목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지기(志氣)가 있고 강하고 과감하여 주로 전공을 통하여 입신하였다. 역사드라마 천추태후를 본 사람은 기억이 날지 모르겠다. 목종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사람이다. 

드라마 천추태후에서 채시라가 그 역할을 맡았는데 태조의 손(孫)으로서 유일하게 왕위계승 자격을 가진 대량원군(大良院君)을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죽이려고 하자 강조가 그 일당을 제거하지만  강조에 의해 폐위당하여 태후와 함께 충주로 가던 중 적성(積城)에서 강조가 보낸 사람들에 의하여 시해되었다. 

강민첨 장군은 고려 전기에 추성치리익대공신에 책록 된 공신이다. 그가 본격적으로 활동한 것은 시해당한 목종 뒤에 왕위에 오른 현종 대다. 1012년(현종 3) 5월에 동여진(東女眞)이 영일(迎日)·청하(淸河) 등지에 쳐들어오자 도부서(都部署)의 문연(文演)·이인택(李仁澤)·조자기(曺子奇) 등과 함께 안찰사로서 주군병(州郡兵)을 독려하여 격퇴하였다.

규모가 큰 비에 진주강 씨인 강민첨장군이 지중추사 병부상서가 되어 있다는 것을 새겨두었다. 진주강 씨들의 흔적을 보았으니 두방재를 보기 위해 발걸음을 해본다.  

이곳에서 행사를 많이 하는지는 몰라도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 참 넉넉하다. 역사서에서 요나라가 등장한 것은 바로 귀주대첩이다. 역사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도 귀주대첩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소손녕이라는 사람이 죽은 후 그의 형인 소배압이 이끌고 온 군대를 물리친 전투다. 그 이전에 요나라에서 고려에 온 적이 있었다. 

일명 거란의 1차 침입인 993년으로 이때 서희의 담판으로 강동 6주를 내주고 강화한 뒤 철군하였다. 소손녕은 황족인 월국공주와 결혼을 했는데 부마도위에 만족하지 못했는지 월국공주가 병에 걸렸을 때 소태후가 보낸 궁녀와 간통을 하게 된다. 월국공주는 그 사실을 알고 화병에 걸려 죽었는데 이에 소태후는 소손녕을 잡아서 죽인다. 

하동 두방재는 강민첨의 초상을 모신 사당이다. 강민첨은 문신이었지만 고려 현종과 문종대에 전쟁에서 세운공으로 공신각에 초상이 올랐다. 본래 우방사에 강민첨의 초상을 모셨다가 조선 정조 원년(1777)에 두방재를 세웠다. 

두방재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2칸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을 올렸다. 가운데 대청은 2칸으로 여유가 있으며 개방적으로 만들어두었다. 

1018년 거란의 소배압(蕭排押)이 10만의 군사를 이끌고 내침하자 대장군으로 평장사(平章事) 강감찬(姜邯贊)의 부장으로 출전하여 흥화진(興化鎭)에서 적을 대파하였다. 고려 그리고 요나라의 이야기 속에 사람과 사람이 얽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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